만대루와 백제성루
만대루와 백제성루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6.24 1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우리나라에 있는 50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마을 중 하나로 안동 하회(河回) 마을이 있다. 이곳은 풍산(豊山) 류씨(柳氏)가 대대로 세거(世居)하던 곳으로, 사당(祠堂), 종택(宗宅), 서원(書院), 정사(精舍), 누대(樓臺), 강학당(講學堂) 같은 다양한 건축물들이 나름의 멋과 역사를 지닌 채 보존되고 있다. 이들 건축물들은 모두 나름의 명칭이 붙여져 있는데, 보통은 지명을 본뜨거나, 그 용도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붙여지지만, 간혹 그것들과 유관한 유명 글귀에서 이름을 따오기도 한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屛山書院)의 만대루(晩對樓)는 그 앞에 펼쳐지는 경관만큼이나 그 누호(樓號) 또한 운치가 넘쳐난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가 백제성루(白帝城樓)라는 시에서 읊은 분위기를 살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 白帝城樓 백제성루에서

江度寒山閣 강은 겨울 산의 누각을 건너고

城高絶塞樓 성은 아득한 변방의 누대보다 높도다

翠屛宜晩對 푸른 병풍의 산은 마땅히 저녁 늦도록 마주해야 할 것이고

白谷會深遊 하얀 골짝의 물은 반드시 깊숙이 노닐어야 하나니

急急能鳴雁 무엇이 그리 급한지 기러기 울음 능숙하고

輕輕不下鷗 어찌나 가벼운지 갈매기 내려앉지 않도다

彝陵春色起 무너진 언덕으로 봄빛 일어나니

漸擬放扁舟 점차 작은 배 흩어지는 듯하도다

※ 장강(長江) 삼협(三峽)의 초입에 우뚝 솟은 백제성(白帝城)은 삼국지(三國志)의 유비(劉備)가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하다. 두보(杜甫)도 이 근처에서 1년여를 기거하며 많은 시작(詩作)을 하였는데, 이 시도 그 중 하나이다. 시인은 백제성(白帝城)의 한 누대(樓臺)에서 아래로 강을, 위로는 성(城)을 바라본다. 강은 겨울 산의 누각(樓閣)을 건너 어디론가 흘러간다. 시인이 머물고 있는 누대(樓臺)는 절벽 높이 솟아 있지만, 백제성(白帝城)은 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다. 여기까지는 웅장하고 험준한 주변의 경관에 대한 묘사로 그다지 운치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운치는 다음 대목에서 제대로 나타난다. 푸른 병풍(翠屛)은 병풍처럼 둘러 쳐진 푸른 산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이러한 산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으므로, 아침에 해 뜨자마자 시작해서 저녁에 해 저물 때까지 보아야 마땅하다는 시인의 말에는 그야말로 운치가 넘쳐난다. 산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온종일 보아야 한다고 했을까? 산 뿐만이 아니다.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운치가 산 못지 않다. 하얀 물살의 골짜기는 반드시 초입부터 깊숙한 곳 까지 샅샅이 다니며 노닐어야 한다고 시인은 일갈한다. 골짜기의 매력을 이 이상 어떻게 더 잘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누대(樓臺) 주변으로 기러기와 갈매기가 날고 있다. 기러기는 고향 소식을 연상시키고, 갈매기는 유유자적하는 은자(隱者)를 떠오르게 한다. 고향 소식 전하는 기러기는 부지런히 날아야 하고(急急), 욕심 비운 갈매기는 가벼워서(輕輕) 내려앉지 않아도 된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바야흐로 봄이 와서 꽃이 피어나는 광경을 작은 쪽배가 물살을 가르고 퍼져 나가는 모습에 비유한 것 또한 절묘하기 그지없다.

유가(儒家)의 예법(禮法)을 강학(講學)하던 서원(書院)의 엄격한 분위기가, 운치 있는 시구(詩句)를 인용해서 이름을 붙인 만대루(晩對樓)로 인해 한층 부드러워지지 않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