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가기 전 돼지 잡아 '슬픈 동네잔치'
피난 가기 전 돼지 잡아 '슬픈 동네잔치'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3.06.23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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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김갑인씨가 겪은 6·25전쟁
6·25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졌던 흑교(검억다리·현 안궁교)와 천안역 부근 피난민 모습(오른쪽 위), 1950년 7월 경북에서 피난가는 모습(아래)

전쟁은 불청객… 농사일·상환기일 빚이 더 큰 걱정

전쟁발발 10여일 후 새벽 이웃주민 30명과 피난길

한달남짓 피난생활… 어머니·누이 피난처서 상봉도

◇ 어디 가서 무얼 먹나?

김갑인씨(金甲寅·1914~1976)가 6·25가 일어난 사실을 몸으로 느낀 건 사흘이 지난 뒤였다. 며칠 전부터 모내기 준비로 마음을 졸여 정신이 없었다. 논에 물을 대느라 모내기 일손 구하랴. 다행히 6월 26, 27일 이틀에 걸쳐 무사히 모내기를 끝냈다.

그에게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건 농사를 망쳐 처자식들 먹일 게 없어지는 것이었다. ‘북선(北鮮) 인민군’이 쳐들어온 건 알았지만 눈앞에 닥친 농사일이 더 급했다.

그는 28일자 일기에 “공중에 비행기 소리 요란하고 폭격소리가 방고래를 울렸지만 식량조차 떨어진 나로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썼다. 6월은 소위 보릿고개로 농촌에 먹을거리가 떨어지는 시기다. 상환 기일이 30일인 동네 계에서 빌린 빚도 큰 걱정이었다. 당시로선 갑인씨에게 전쟁은 고단한 삶을 덮친 불청객일 뿐이었다.

저수 둑을 수리하려고 마을 사람들을 모았으나 온통 난리 얘기뿐이었다. 일이 되질 않았다. 29일 이발하러 면소재지 성환에 갔다. 피난민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떼를 지어 방황하는 모양이 눈에 띄었다.

날이 갈수록 대포소리가 크게 들리고 비는 오락가락했다. 마음만 산란했다. 보리 방아부터 찧어놓을 작정으로 정미소를 찾았으나 전기가 끊겨 헛걸음쳤다.

“비는 쏘다진다. 비행기·총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북편(北便)이 이기는가 남편(南便)이 이기는가. 어느 쪽이 승리를 할는지 일반 민가의 가슴만 설레일 뿐이었다. 살는지 죽을는지 제반사에 마음이 없다.”

친구 최묘진이 대한청년단(49년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우익단체) 간부회의가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난시일수록 관의 명령은 지엄했다. “말썽 많은 난시로서 안 나갈 수 없어 우산을 빌려서 길을 나섰다.”

7월 2일 서울 사는 김흥식이 고향 안양마을로 피난왔다. 서울은 폭격으로 전멸 상태이고, 직선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용인으로 돌아서 왔다고 했다.

3일 오후 4시 ‘십자형 비행기’ 10여대가 평택을 공습하더니 이어 볏학재(대홍삼거리 부근)을 폭격했다. 성환에서 탄알을 싣고 서울 쪽으로 올라가던 트럭 3대가 부서졌다. 그것도 모르고 최묘진과 함께 성환 면소재지를 가다 지족향(知足鄕·수향1리)에서 돌아섰다.

서울서 내려온 경찰 2명이 찾아와 하루 유숙을 부탁했다. 저녁밥을 해 먹이고 밤이 늦도록 전황을 들었다. “서울은 죽엄(시체)이 산을 이뤘다”고 했다.

그렇다고 농사일을 놓을 순 없었다. 고구마를 심고 논 매기를 했다. “죽느냐 사느냐 생사가 근접한 때이건만 원수의 가난은 여전히도 고통을 주었다.”

4일 평택 방면 폭격이 더 심해졌다. 계속 내려가는 피난민을 보니 걱정이 더욱 커졌다. 식량도 없고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늙으신 부모와 젊은 처자식이 거리를 방황하다 참혹하게 고꾸라져 죽는 것이 보이는 듯하여 가슴이 타고 정신이 아찔했다.”

식량 마련이 우선이었다. 밀 방아라도 찌을까 하고 볏학재로 가니 어제 공습당한 자동차 3대가 등걸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대홍초등학교에 가니 운동장에 어제 공습한 폭탄 파편을 주워 놓았다.

성환 정미소에선 피난민들에게 보리쌀 한 말에 1400원씩 팔고 있었다. 밀은 곧 오면 팔 수 있다고 했다. “성환에는 피난민과 군인들이 가득 차서 다닐 수도 없을 정도”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디를 간들 무얼 먹고 살리오. 가슴만 졸이며 발길을 돌려 수천(水川·수향2리)까지 왔는데 거기서 부면장과 면 직원을 만났다. “마을 서기에게 자세한 말을 하였다”며 “흑교(검억다리·현 안궁교)가 폭격에 부서져 통로가 될 수 없으니 내일 부락민을 총동원하여 보수하라”고 했다.

어제 유숙한 경찰 2명이 점심 식사 후 모두 갔다. 상옥이네가 도야지(돼지)를 잡아 1근에 500원씩 판다고 한다. 저녁 후 이시룡은 내일 흑교 보수 출역(出役·노동력 동원)을 상의하기 위해 동회를 열었다.

◇ 생명에 관계된 사역 명령

5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첫 참전한 미군 스미스부대가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참패했다) 사방에서 나는 폭격 소리는 한층 요란했졌다.

“시키는 출역 일은 생명선(生命線)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지 않고는 아니 됨에 비가 오고 있었지만 마을 서기를 시켜 사람을 동원했다. 나도 도시락을 싸서 나갔다. 이런 일에 몸이 매여 당장 해야 할 농사는 어느 겨를에 손을 댈지 모르겠다.”

궁리(宮里·안궁2리) 사람 동원을 위해 도착하니 비가 더욱 퍼부어 아무리 해도 오늘의 일(흑교 보수)을 할 도리가 없었다.

비는 여전이 쏟아지고 비행기 소리에 하늘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국도(1호)에는 군인을 가득 실은 트럭이 꽁지를 물고 연속해서 내려왔다.

6일 비는 계속 내리는데 각처에서 밀리어 오는 피난민들이 집집마다 10여명씩 들어찼다. 동네 사람들도 피난을 가기로 했다. 오후 또 공습이 있어 사람을 놀라게 했다. 나도 저녁 먹고 도야지 한 마리 있는 것을 잡아 ‘가슴 아픈’ 동네잔치를 했다.

전 가족이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 일찍 김흥식이네 식구와 함께 약 30명이 피난을 나섰다. 아버님만 남기어 두고 가까운 입장면 송우촌(松牛村·현 평택시 서운면 송정리 추정) 김경춘(친척) 집으로 갔다. 대경네도 어제 왔다고 했다.

8일 경춘과 상의해 방공호를 팠다. 이날 인민군이 천안 각처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날 오전 천안 함락) 비를 맞으며 청룡동과 청당동 준령을 넘어 성터 속골(성거산 소학골)로 갔다. 이미 이곳에도 피난민이 많아 여기저기 찼다. 좁은 집에 사람들이 많아 우리는 도야지막(돼지우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갑인씨 가족 중 일부는 다시 안궁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갑인씨는 기동리(基洞里·위례산 텃골), 속골, 연화대(鍊花垈·위치 미상)를 오가며 한달 남짓 피난 생활을 했다. 이 기간에는 일기는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다만 7월 17일자에 어머니와 안성에 사는 누이를 피난처에서 만난 사실을 적고 있다. “남매가 죽지 않고 만나니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안성도 폭격으로 3000호나 불탔다고 한다”고 짧게 썼다. 피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인 8월 1일 연화대로 나와 매부를 만나보려고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 자녀가 말하는 아버지의 일기

아버지는 하루 중 꼭 시간을 내

오랫동안 일기를 썼다.

아마 일기는

아버지에게 생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 딸 은순씨

아버지는 말년에도 일기를

아침에도 저녁에도 쓰며, 끼고 살았다

말년에 붓으로 일기를 썼는데

망가진 붓 모아놓은 게 수십개나 됐다.

- 막내아들 학실씨

김은순씨(66·여·경기도 평택)는 6·25 당시 세살이었다. “어머니(1999년 작고) 말에 따르면 어른들은 전쟁 때문에 불안해하는데, 나는 피난 가서도 즐겁게 놀고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은순씨는 김갑인씨 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바쁜 농사일로 은순씨를 잘 돌보지 않아 급체에 걸려 토하거나 설사하기 일쑤였다. 경기가 들려 포룡환을 구해 먹이기도 한다. 아플 때가 많아 갑인씨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성환 면소재지에 나가면 어린 딸에게 줄 과자 사오는 걸 잊지 않았다.

은순씨는 “아버지는 하루 중 꼭 시간을 내 오랫동안 일기를 썼다”며 “아마 일기는 아버지에게 생명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했다. 52년 어느 날엔 갑인씨는 은순씨는 집에 놀러온 동네 친구 앞에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창가를 불러 집안을 웃음바다를 만들었다고 썼다.

은순씨에 따르면 갑인씨는 6·25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장을 했다.

막내아들 학실씨(51)는 “나는 아버지 나이 50에 얻은 늦둥이로 매우 귀여워 하셨다”면서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도 꼭 앞세우고 다니셨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말년에도 일기를 아침에도 저녁에도 쓰며, 일기를 끼고 살았다”면서 “말년에 붓으로 일기를 썼는데 망가진 붓 모아놓은 게 수십개나 됐다”고 덧붙였다.

자녀들에 따르면 갑인씨는 간경화로 1976년 63세에 작고했다. 학실씨는 아버지가 자신(175)보다 더 큰 장신이었다고 회고했다.

천안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갑인씨 일기는 총 103권이다. 1938년 4월 시작돼 75년 7월까지 38년간 작성했다. 직접 표지를 만들고 끈으로 묶어 일기장을 제본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로, 말년에는 한문으로 세로쓰기를 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국한문을 섞어 깔끔한 펜글씨로 가로쓰기하고 있다. 천안박물관은 이 일기를 지난해 5월 ‘민촌(이기영)과 함께 천안 근대를 가다’ 전시회 때 처음 선보였다. 현재 일기는 보존처리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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