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지위에서 벗어나려면 새 판을 짜라
을의 지위에서 벗어나려면 새 판을 짜라
  •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 승인 2013.06.1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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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귀룡 <충북대학교 교수>

대기업 임원의 비행기 승무원 폭행 사건이 잠잠해질 무렵, 한 유업회사 직원의 대리점 점주에 대한 막말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으로 국민이 공분하고 있을 즈음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에서 인턴 여직원을 성추행한 사건이 불거졌다. 그러자 유업회사 막말사건은 잠잠해졌고, 그 후 남양유업이 청와대 대변인에게 감사장을 줘야 한다는 말이 떠돌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은 소위 사회적 약자로서의 을에 대한 사회적 강자인 갑의 횡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지위와 금력을 배경으로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고, 권력을 무기로 사회적 약자를 성노리개로 삼고자 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아주 나쁜 사례들이다.

원래 갑을관계는 경제 행위에서의 계약 주체들을 일컫기 위한 법률 용어다. 그러나 갑을관계는 이제 더 이상 경제적 관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회에는 갑을관계로 표현되는 불평등관계가 만연해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고용인과 피고용인, 상급자와 하급자,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는 모두 갑을관계다. 즉 갑을관계라는 악습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갑을관계에서 갑은 행복하고 뿌듯하지만, 을은 불행하고 비참하다. 갑의 눈 밖에 나면 인사와 금전상의 손해가 불 보듯 하기 때문에 을은 갑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갑에게 돈은 물론이고 각종 향응을 제공하면서까지 심기를 거슬리지 않으려 한다. 법률적 계약관계가 인격적 종속관계로까지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존심을 굽히며 비굴하게 살아야만 사회적 생존이 가능할 지경이다.

개인과 조직은 갑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확립된 불평등관계에서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그러나 을이 갑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갑을의 악순환 고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갑을관계는 반영구적으로 고착된다.

이유는 을의 자리에서 벗어나 갑의 자리에 서면 또 다른 갑에게 을이 되기 때문이다. 과장에서 부장이 되면 과장에게는 갑이지만 이사에게는 을이 되고 이사가 되면 또 다시 사장에게 을이 된다. 대학의 경우도 아시아 100대 대학에 들게 되면 그보다 순위가 떨어지는 대학에 대해서는 우위에 서지만 상위 99개의 대학에 대해 을의 위치에 서게 되는 법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모든 대학이 평가기관에 대해 을이 된다는 데 있다.

갑을관계에서 갑의 눈치를 보면서 생존을 모색하거나 갑의 자리를 탐하는 방식으로는 을의 위치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을의 위치를 벗어나려면 판을 새로 짜는 것이 좋다. 갑을관계는 특정의 가치를 기준으로 줄 세우는 데서 시작된다. 돈을 기준으로 하면 가진 자가 갑이 되고 갖지 못한 자가 을이 되며, 권력을 기준으로 삼으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갑을관계가 성립된다. 이런 지표를 자기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개인이나 조직은 을이 되는 법이다.

공정한 갑을관계의 실현을 위해서는 을이 연대하여 갑의 횡포를 감시하고, 공정한 갑을관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을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의 처지를 냉정하게 분석하여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할 때 부당한 갑을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고유의 가치와 자존감을 세울 수 있는 판을 짜야만 갑을관계의 불이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품격이 있으면 지배당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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