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외과 317호 병동에서
정형외과 317호 병동에서
  • 김우영 <작가. 한국문인협회>
  • 승인 2013.05.0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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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의 에세이-우리말 나들이
김우영 <작가. 한국문인협회>

온양에서 살 때 일이다. 교통사고로 병석에 누운 아내의 속옷을 가지러 집에 들렀다. 허름하게 녹슨 양철 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니 두 딸이 반긴다.

"아아빠, 왜 이제 와?' '아아빠! 우리 빵 사줘" "응, 알았다. 오냐 아빠가 이따가 사주마!"

바지 끝에 매달리는 아이들의 가슴을 끌어 안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칠순의 노모가 밥을 짓고 있었다. 가뜩이나 당뇨로 고생하시며 허리가 아프신 어머님이 더욱 가련해 보인다. 젊은 며느리와 막내 손자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병실에 누이고, 집에서는 두 손녀가 칭얼대고, 병원으로 보호자 밥을 해 나르랴, 각종 세탁물을 준비하랴, 노구에 여간 어려움이 더하랴. 어머니로부터 아내의 갈음할 속옷을 받아 챙겨들고 밖으로 나서자, 큰딸과 작은딸이 바지 끝에 매달려 또 보챈다.

"아아빠, 아까 빵 사준다 했으니 사줘야지, 응?"

양 팔에 매달린 두 딸을 데리고 인근 가게로 가니 평소 잘 아는 아줌마가 인사를 한다.

"아니, 애 엄마와 애가 경운기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에그 이를 어쩌나. 가족 둘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쯧쯧쯧…"

구멍가게 아줌마의 걱정스런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이 원하는 빵과 아이스크림을 사주니 철없는 아이들은 그저 좋아서 이런다.

"아아빠가, 최고야 최고!"

아이들을 노모 곁으로 보내려니 이번에는 또 아빠를 따라오려 한다. 그러자 저만치 대문가에 나와 계시던 노모가 꾸부정한 허리를 매만지며 호통을 치신다.

"어여 가라, 어여 가! 이 철없는 것들아, 아빠는 어서 병원에 들러 직장에 가야혀 이눔들아!"

칠순의 노모는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려하고, 철없는 아이들은 빵을 잘 사주는 아빠 곁으로만 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버스 정류장 쪽으로 떼었다. 뒤에서는 울음 섞인 아이들의 투정이 귓전에 울리며 바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듯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 안경 너머의 눈가에 벌써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지나는 행인들에 행여 눈치 채일까 싶어 손수건을 꺼내어 휑-하니 코를 푸는 척 눈가를 씻고 병원행 버스에 올라탔다.

병원 근처에 와서 오늘은 꽃이나 사려고 꽃집으로 향했다. 늦게 핀 영산홍이 불같이 화려한 화분위에 얹혀 있었다. 철쭉은 한문으로 척촉이라고도 한다던가. 이 꽃을 보고 발걸음을 머뭇거리고 서 있다는 뜻이다. 정말 필자도 영산홍을 보고 병석의 아내한테 사다 줄까, 말까 마음 설레이고 있었다. 영산홍, 부귀를 뜻하고 불같이 일어나는 청운의 뜻이 담긴 이 영산홍을 아내의 머리맡 화병에 꽂아주자. 얼른 다리가 나아 불 같이 일어나도록 저 화려한 영산홍을 아내의 가슴에 환하게 안겨주자.

아내여/ 내 아내란 가련한 여인이여/ 왜 여기 누워있는가// 집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울고 있는 것을…// 아내여/ 내 아내여/ 여기/ 안달래 반달래/ 이 가지 저가지 노가지나무/ 진달래 왜철쭉 한 아름/ 당신한테 바치노니/ 불 같이 일어나거라!// 모란 작약 철쭉을 세우(勢友)라!/ 화목구품(花木九品) 중 이등품/ 세종 때 강희연이 이르던 꽃이요// 아내여/ 내 아내여/ 당신은 아내 중의 아내// (-自作詩 “아내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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