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건망증
디지털 건망증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03.17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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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사찰에 재무 볼 때의 일이다.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려는데 손에 가방이 들려있지 않았다. 당연히 차에 두고 내렸거니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생각을 더듬어 다시 사찰로 올라가보니 가방은 온데간데없었다. 보통일이 아니었다. 지갑 속에 내 통장이며 카드는 접어두고, 사찰통장과 서류들 잃어버린 것이 난감했다.

혹시나 하고 파출소를 들렸다. 창피함에 고개도 못 들고 모기소리로 “여기 혹시 빨간 가방 누가 주어오지 않았어요?” “주민번호가 뭡니까?” 남자직원의 퉁명스런 말투가 순간 누가 가지고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체부 아저씨가 길에서 주어서 가지고 왔다면서 역시나 여자가 칠칠맞게 흘리고 다닌다는 말투였다. 얼굴도 못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나오는데 뒤통수가 화끈했다. 되짚어보니 가방을 트렁크 위에 얹어놓고 세차를 하다가 그대로 운전을 한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천번 만번 절을 하고 싶었다. 하긴 운전을 하다가도 도착지를 그냥 지나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잘 기억하던 것을 잃어버려 이것도 현대에선 디지털 건망증이라고 한다니,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 나뿐 아니고 너나없이 외우기보단 기계가 대신 입력을 해 주니 머릿속에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아침 상담실로 향하는데 농담 좋아하시는 부장님의 한 말씀 “머리에 파마를 말고 오셨어요?” 아뿔사! 머리에 분홍색 찍찍이 헤어롤을 달고 출근을 한 것이다.

나는 노래를 좋아하면서도 가사를 외워 부르지를 못하고, 하다못해 가족과 지인들 전화번호도 거의 외우질 못한다. 많은 기능을 해결할 수 있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의지한다. 그러니 이것을 잃어버리는 날엔 바보가 될 수밖에. 그런데 정말로 잊고 싶은 일들이 많다. 살면서 어찌 좋은 일들만 있을까마는.

내 마음을 혹사시킨 겨을은 지나갔다. 심하게 넘어졌는데도 남이 볼까봐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얼른 일어났다. 정신없이 일만하면서 달려왔던 몇 해가 지나고 나서 난 겨울끝자락쯤에 많이도 아팠다. 마음이 멍든 나 자신을 미워하면서 모두가 너 때문이라고 또 다른 이들도 미워했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건망증이 아니라 완전 치매라 해도 그쪽이 더 좋을 듯싶은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우리 집 거실 벽에 붙은 표구 속에 해불 양수란 글귀가 눈에 쏙 들어온다. 바다는 깨끗한 물이라고 환영하고 더러운 물이라고 물리치지 않으며, 자기에게 오는 물을 다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서 깨끗한 물로 정화 시켜 다시 내보낸다고 한다. 나는 일을 하면서 편견이나 안 좋은 말, 또는 여러 상처들이 오 갈 때, 디지털 건망증이 와서 까맣게 잊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꿋꿋이 견디고 깨끗한 말이나 행동으로 정화시켜 내 보낼 수 있는 씩씩한 내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기에 해불 양수란 그 글귀가 내 마음에 오래 머무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또래들이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디지털 건망증을 넘어 아날로그 건망증인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너도나도 잊어버렸다는 이들만 있다. 모두들 너무 바쁘게 산다. 머릿속의 기억장치도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모두 기억을 못하는가 보다. 건망증은 다행인 것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대부분 다시 떠오르게 된단다. 디지털 건망증이 아날로그건망증보다 한수 위인지 아래인지 또 생각중인 지금, 나에게 디지털 건망증 탈출 계획서를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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