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여성학
다시 쓰는 여성학
  • 연규민 <칼럼니스트>
  • 승인 2013.03.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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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연규민 <칼럼니스트>

지금부터 105년 전 3월 8일 뉴욕 러트거스광장. 여성 섬유 노동자 1만 5천여 명이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을 부르짖었다. 2년 후 1910년 코펜하겐. 제2차 여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에 따라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결의하였다. 이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는 ‘빵’과 ‘장미’로 비유된다. 배고픔을 상징하는 빵(생존권)과 권리를 의미하는 장미(평등권)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 여성의 자유와 지위가 향상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84년부터 여성노동자단체를 중심으로 여성의 날 기념식과 여성문화제 등을 열어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본다. 2000년 이후에는 비정규직 여성들의 권리확대를 위한 노력으로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학의 방향을 알아보기 위해 몇 권의 대학 여성학 교재를 살펴보았다. 그 중 한 저자의 고백이 눈에 띈다. 처음 여성학을 강의할 때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당하는 차별과 편견에 대해 분기탱천하여 열변을 토하였는데 많은 공감을 얻었단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후 남학생들도 여성학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남학생들로부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게 여성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새롭게 여성학의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 다양한 입장과 인식을 이해하고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다시 쓰는 여성학의 입장이다.

여성이 억압받고 남성은 가해자였던 반목의 시대를 넘어섰다. 여성들에게 주어졌던 작은 빵조각을 서로 갖겠다고 여성들끼리 다투던 불화의 시대도 지나갔다. 여성과 남성, 다양한 입장에 서 있는 여성들끼리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성장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런 큰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지역의 여성운동에도 틀이 변하는 과도기적 성장통이 느껴진다. 여성운동의 대명사였던 여민회의 해산은 허탈한 일이었지만 새로운 차원의 여성운동이 태동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위안을 삼는다.

새로운 여성운동은 먼저,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이 무조건 약자의 입장이고 무조건 밀어줘야 하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분명한 입장에서 시작해야 한다. 몇 년 전 한 노조에서 기관장에게 여성노동자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여성단체는 물론 시민단체도 분노해서 도청 앞에서 연일 시위를 했다. 그러나 재판결과 이 기관장은 혐의를 벗었다. 한 사람의 명예뿐만 아니라 그 가족(대부분이 여성인)의 삶은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도 언론과 시민단체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여성이 억압당하는 형태가 다양해지고 그 계층도 다양해졌다는 이야기다.

둘째, 여성운동은 여성끼리 하는 운동이 아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려는 노력을 하는 모든 이들이 연대하는 것이다. 여성끼리 하는 운동이 되면 성적 소수자는 어느 곳에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셋째, 지역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여성운동 또한 세계화 바람으로 지역적 특성이 사라지고 대자본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지역 여성사회의 독특함도 지켜가고 지역의 여성문화를 잘 가꿔갈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통은 살리되 실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제도와 전통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기와와 초가를 밀어내고 슬레이트지붕으로 몽땅 바꾸는 새마을운동식 여성운동은 더 이상 안 된다.

이번 여성발전센터 대표는 새로운 지역여성운동 창출에 적합한 분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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