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 죽
냉이 죽
  • 이재성 <수필가>
  • 승인 2013.03.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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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재성 <수필가>

천등산 깊은 골짜기 응달엔 아직도 잔설(雪)이 남아 희끗희끗하다. 마치 어머니의 백발을 보는 듯 하다. 강산의 모습이 무시로 변하듯 많은 추억을 남기고 세월은 흘렀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이른 봄이었다. 종일 뛰어 노느라 흙강아지가 된 이른 저녁 때였다. 집에 돌아 오니 어머니께서는 그날도 죽을 끓이고 계셨다. 냉이 죽 이었다.

무쇠 솥에서 펄펄 끓으며 풍기는 된장 냄새와 이른 봄 냉이의 향기는 허기진 배를 더 허기지게 했다. 뜸 들이는 참을 기다리지 못하고 반(半)은 졸린 눈으로 부엌 문지방에 쪼그리고 앉아 얼마나 칭얼거리며 보챘는지, 결국은 부지깽이로 한대 얻어 맞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어둑한 밤이 돼서야 등잔불 밑에서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독상을 받아 놓고 두 그릇이나 먹었다. 어느 철학자는 “눈물의 빵을 먹어 본 자만이 생(生)의 맛을 안다”고 했던가. 그 맛과 향은 지금도 절실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어려서는 갖가지 푸성귀 죽을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무를 넣으면 무 죽, 콩나물을 넣으면 콩나물 죽이 되었다. 콩죽, 배추 죽, 시래기 죽, 보리 죽, 호박 죽, 강냉이 죽도 있었지만 호박범벅이나 메밀범벅이란 것도 있었다. 떡 중에는 보리개떡이란 것이 있었는데 보리겨를 아무리 고운 체로 쳐서 빚는다 해도 가시를 씹는 듯 까칠까칠한 것이 어지간히 맛도 없었던 것 같다.

멀겋게 끓인 죽은 먹을 때 뿐이고 돌아서면 속은 허전했다. 조신하게 앉아 있지 못하고 산이며 들판을 이리 치닫고 저리 뛰는 것이 놀이의 전부였으니, 배고픔으로 징징대고 걸근거리는 자식들에게는 뛰어 노는 것 조차도 눈치 거리였다. 이렇듯 죽이란 것은 우리 가족이 연명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최저의 생계 수단이었지 싶다.

죽 먹고 허기진 한이 남았는지 밥상 앞에 앉으면 자제가 되질 않는다. 음식은 절대 남기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핑계가 되고, 알뜰하게 먹어주는 것이 외식 집 사장님에 대한 예의이며 도리라는 궤변을 늘어 놓기도 한다.

이제는 산해진미(山海眞味)마저 시들해졌다. 식도락(食道樂)을 찾아 몇 백리 먼 길을 주저 하지 않고 옥체(?) 보존을 위해 보양식을 찾아 혈안이다.

뒤늦으나마 먹는 복은 타고 난 모양이다. 되레 그 복이 너무 많아 차고 짓까불러서 탈이 날 지경이다. 주어진 그 복을 간수(看守)하지 못하여 되레 병만 얻는 것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독 오른 복어 배 마냥 볼록한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과 체중이며 체지방률이 높고 복부비만이라고 아우성치며 이제는 굶어야 한단다. 굶어야 행복해 지고 뛰어야 무병장수하는 세상이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따로 없다.

보는 것 조차 멀리 하고 싶었던 그 죽이, 웰빙이라는 명패를 달았다. 조선시대의 선비마냥 가부장을 틀고 시내 중심 번화가에 번듯하게 터를 잡고 앉아 최신식 인테리어에 화려한 조명까지 받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옛날에 어머니가 해 줬던 이른 봄의 냉이 죽만큼은 참 맛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 어려서 기억이 희미해진 우리 어머니의 젖 냄새 보다, 아주 이따금씩 맡아 보았던 향긋한 어머니의 분 냄새보다도 진짜 우리 어머니의 향이었지 싶기도 하고, 보약이었던 것 같다. 철 따라 나오는 그 보약들을 받아 들고도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은 투정만 부렸다.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것이 당신의 죄인 듯 통한의 눈물을 삼키셨을 어머니를 생각을 하면 가슴 아프다.

이제 우수, 경칩이 지났으니 성급한 처녀들은 봄바람이 날 때가 되었다. 양지 바른 곳에 가면 냉이 몇 뿌리는 캘 수 있을 것 같다. 냉이 한 움큼 캐어 들고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께 청을 드려 봐야겠다. 몸은 불편해 하시면서도 어쩐지 좋아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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