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방의 선물과 아버지의 자화상
7번방의 선물과 아버지의 자화상
  • 오창근 <칼럼니스트·충북참여연대 사회문화팀장>
  • 승인 2013.02.2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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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충북참여연대 사회문화팀장>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학생이 쓴 시라고 한다.

아버지의 위상과 권위 추락이 어디까지인지 보여줘 재미있다고 웃기엔 뭔가 아쉬움이 묻어난다.

TV 리모컨은 아내와 아이들 손에 들어간지 오래고, 베란다는 언감생심 이제 아파트 1층까지 내려와 담배 피우는 아버지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아버지와 아이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의 하나가 대화를 3분 이상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3분이 넘어가면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잔소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아버지의 설 자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직장동료와 어울리는 순간이 전부다.

얼마 만인가. 속 시원하게 울어 본적이.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7번방의 선물’이란 영화를 봤다.

‘레미제라블’의 감동에 한동안 젖어 살다 보니 이후에 개봉한 영화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먼저 본 큰아들 녀석에게 감상을 물어보니 약간 억지스럽고 그저 그렇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볼만한 영화가 없어 ‘7번방의 선물’을 봤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난감했다. 옆에 앉은 집사람 보기도 좀 그렇고 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앞만 주시했다.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다소 모자란 아버지의 애틋한 딸 사랑에 그저 목이 멜 뿐이다. 자식 낳아 길러본 적 없는 사춘기 큰아들 녀석의 감흥과 누군가의 자식으로 어미 잃고, 나 닮은 자식 낳아 기르는 부모 된 자의 심정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곁눈으로 보니 집사람도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눈가에서 손이 떠나지 않는 눈치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많지 않다.

80 넘어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에서 ‘아이고, 아이고’ 운율에 맞춰 곡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중학교 1학년 형이 군대 간다고 큰절하고 버스 타고 떠난 뒤 내리 사흘동안 우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의아했다.

며칠 후 군대 간 형의 옷이 소포로 왔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온종일 우셨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눈물이었다. 내가 군대 갈 때 우셨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아버지의 눈물은 울컥거림이 있다. 애써 감추려 하기 때문에 더 슬픈 애잔함이 있다.

대성통곡보다 조용히 눈가를 닦고 베란다로, 서재로 혹은 담배를 물고 밖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그래서 더 슬프다.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아버지의 공간이 없다.

드라마 속 아버지는 능력 없는 속물로 묘사되거나 가부장적인 권위가 지나쳐 냉정하고 가족과 융화를 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가끔 언론 보도를 통해 듣는 기러기 아빠의 죽음은 아버지라는 존재감이 ‘영혼의 노숙자’ 취급 받은지 오래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란 단어가 어느새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세상물정 모르는 인사의 맘속에 각인된 딸 사랑이 그저 슬프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린다.

영화를 통해 속에 묻혀있던 아버지의 본능과도 같은 사랑이 떠올라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닐까?

밥상머리에 앉아 “공부 잘하고 있지?” 한마디 건네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아버지와 자녀에게 너무 무관심하다는 아내의 핀잔 사이에 아버지란 존재는 늘 길을 잃는다.

아버지는 늘 멀리 보고 있어 떠난 자리에 더 큰 그리움이 남는다.

영화가 끝나자 누구에게 들킬세라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숱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영화를 통해서나마 실컷 울어보는 호사를 누리는 현대 아버지의 슬픈 자화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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