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설날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3.02.0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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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심억수 <시인>

아내는 시장을 다녀왔는지 딱따구리 소리를 내고 있다.

장바구니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고 딱딱 나무 쪼는 소리를 해댄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아내의 나무 쪼는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파 한 단에 3,000원이 뭐야 무는 또 얼마고 세상에 며칠 사이에 물가가 다락같이 오르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 아내의 딱따구리 소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설이 다가오자 아내는 무척 예민해진 것 같다. 아내는 종갓집 맏며느리이다. 아버지 형제가 12남매 우리 형제가 5남매 대종가의 종부 노릇이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명절이 다가오자 챙겨야 할 일도 돌아봐야 사람도 많기만 하다. 또한, 대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낼 준비도 해야 하니 경제적인 부담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짐작할만하다. 잘하든 못하든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큰일이 생기면 나는 저만치 물러나서 아내에게 슬쩍 떠밀어 주고 당신이 알아서 해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아내의 나무 쪼는 소리쯤은 그냥 나무인양 받아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내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내 눈치 보며 비위 맞춰야 하고 숙부와 동생들의 화합을 위하여 애써야 한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 혼자 계시니 서운하지 않게 해드려야 하고 어린 조카들에게 세뱃돈 챙겨 줘야 하며 6대 종손으로서 품위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내는 당신처럼 속이 편한 남자 없을 거라며 도대체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며 또 쪼아댄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명절이면 스키장이나 온천을 찾거나 아니면 국외여행을 즐기면서 여행지에서 간단히 차례를 지낸다는 말도 들린다. 점점 명절의 의미가 축소되고 연례행사의 방편으로 변하여 간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어림없는 일이다. 종가이기에 가풍을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옛날이야 늘 많은 가족끼리 부대끼며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명절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핵가족으로 단출하게 지내기도 하지만 맞벌이 시대로 여자도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명절이다, 제사 다 하여 갑자기 많은 친지가 모이다 보니 거기에 따른 부담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TV를 보니 주말이면 차가 꼬리를 물고 고속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올해도 귀향길은 순조롭지 못할 것 같다. 멀리 사는 동생과 숙부 그리고 조카들이 먼 길 오기에 고생을 많이 할 것 같다. 나는 아내에게 이번 설은 먼데 사는 숙부와 동생들이 고생되니 오지 말라고 전화하고 가깝게 있는 가족끼리 지내자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였다.

아내는 안색이 변하며 명절이 아니면 언제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겠느냐며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집안 대청소와 장보기라도 도와 달라며 핀잔을 준다. 한편으로는 머쓱하고 미안하고 또한 고맙다.

올해도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고 나면 동생들은 빨리 처가로 갈 궁리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종갓집 종부이다 보니 명절에 한 번도 친정에 다녀온 적이 없다. 장모님도 돌아가셔서 이제는 친정이라고 갈 곳도 없지만, 장인 장모님 계실 때 친정 한 번 가도록 배려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번 명절엔 아내와 함께 장인 장모님 산소를 찾아뵈어야겠다.

아내의 나무 쪼는 소리는 문지방 너머 따따 딱 귓전을 때린다. 그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올 설도 딱따구리 아내의 나무 쪼는 소리로 둥지 하나는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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