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없는 사회가 언제쯤이나 되려나
노숙자 없는 사회가 언제쯤이나 되려나
  • 이규정 <소설가>
  • 승인 2013.02.0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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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규정 <소설가>

오늘도 저녁을 먹고서는 버릇처럼 주저앉는 컴퓨터 책상에서 화들짝 놀라는 눈망울이 벌어졌다. 노숙자가 하루에 한명씩이나 동사한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노숙자가 동사했다는 것은 심심찮게 들려오던 이야기다. 하지만 하루에 한명씩이나 동사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조차 못하던 일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구체적은 입증자료에서도 부정조차 못하는 현실이었다.

노숙자란 하룻저녁 쉴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지하철이나 건물 처마 밑에서 하룻저녁을 보내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심조차 없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또한 우연찮게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만났던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또한 우연찮게 노숙하게 된 것은 지난해 이른 봄이었다. 그날도 서울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밤늦도록 주고받는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거기에 또한 반기듯이 주고받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밀밭에서도 취하는 사람이라 한 모금을 겨우 삼키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마시는 술에서도 얼마나 취하는지 나도 모르게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쫓아가는 서울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놓쳐버렸다,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첫 열차가 출발한다는 대합실에서 곧바로 쓰러질듯이 휘청거리는 몸뚱이가 제법이나 무거웠다. 거기에 얼마나 졸리는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내려앉는 눈까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쩌지 못하고 노숙자들이 나란히 누워서 잠들은 대합실 바닥에 누었다. 어느 사이에 잠들었는지 누군가 깨워서야 일어났더니 아침 여섯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나를 깨웠던 사람은 대합실 바닥에 종이박스를 보물단지처럼 잡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침대삼아 사용하는 종이박스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해장국을 사겠다고 쫓아가는 식당에 마주보고 주저앉았다. 해장국을 먹으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아차리는 노숙자들은 나하고 비슷한 나이였다. 사업을 하다가 망했고, 보증을 섰다가 집조차 차압당하고, 병든 아내를 살리려다 노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해장국을 먹고서는 일어서는 노숙자들은 하루의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머쓱하게 쳐다보면서 안타깝다는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쓸쓸하게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사이에 한해를 보내면서 까맣게 잊었던 그들이 인터넷 신문을 보고서야 생각난 것이다. 하루에 한명씩이나 동사한다는 기사에 또한 화들짝 놀라는 눈망울이 벌어진 것은 그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노숙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지 못하고 노숙하는 사람들이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노숙하기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혹한을 견딘다는 것은 죽음보다 못한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혹한에도 하루저녁 쉴 곳이 없는 노숙자들. 그들을 보살피지 못하고 동사하게 하는 것 또한 현대사회의 구조적인 책임이기도 하다. 하루라도 빨리 노숙자가 없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지만 그 또한 쉽지가 않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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