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보무사 <147>
궁보무사 <147>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06.08.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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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데 내가 어찌 그들의 뜻을 거슬린단 말인가"
34. 소용돌이 속에서

"눈 밖으로 한 번 밀려났던 사람이 또 다시 눈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법이옵니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 팔결성을 향해 오는 군대를 모두 되돌리고 백곡 혼자만 팔결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가는 십중팔구 백곡은 저들에게 사로 잡혀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백곡은 어젯밤 성 수비대장 주중의 허락도 없이 팔결성을 함부로 빠져나갔으니 이미 죽을죄를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그럼, 이제 나보고 어찌하란 말인가"

두릉이 무척 난감한 듯 괴정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백곡이 팔결성을 향해 몰고 오는 군대를 돌려가지고 옥성(玉城) 성주 취라의 군대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동북쪽으로 가게 하십시오. 그리고 백곡을 장(將)으로 삼아 그곳에서 아예 머물게 하십시오. 백곡을 팔결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개죽음을 당하게 해서는 절대로 아니됩니다. 두릉님이나 저나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두릉님께서 충성심이 강한 백곡 같은 부하들과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한 병졸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결정적인 허를 저들에게 내보였다가는 두릉님과 저희들은 저들의 단칼에 당장 찔리고 말 것입니다."

괴정이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장수 외북과 친구 창리는 거의 죽을 뻔 한 나를 위험에서 건져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나를 믿어주고 있는데 내가 어찌 그들의 뜻을 거슬린단 말인가"

두릉이 몹시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괴정에게 다시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자기 하나 뿐이며 자신도 힘이 있어야만 유지를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든 힘을 빼앗기게 되면 그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른 사람의 힘이 곧바로 채워지게 되지요. 외북님과 창리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저로서는 잘 모르지만 그것은 두릉님께서 어느 정도 힘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유지되는 우정(友情)일 것입니다."

"으으음."

두릉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또 튀어나왔다. 그리고 뭔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이것저것 궁리를 해보더니 마침내 두릉은 결심한 듯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럼 자네 말대로 백곡에게 연락을 취해 팔결성으로 오지 말고 동북쪽으로 가라 이르겠네. 참! 그런데 자네가 고향 처녀 하나를 내게 보내준 적이 있었지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가 난 그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기에 그저 늘 '아가'라고 부르기만 했었으니."

"향정(香井)이라고 그때 두릉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던 걸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향정 아 참! 그랬었지. 그 아이의 백옥 같이 하얀 두 다리 사이를 가만히 벌려보니 작고 예쁘고 비좁은 틈새가 검불에 살짝 가려져있었고, 내가 그곳을 살짝 헤쳐보니 깊은 옹달샘에서 향긋한 냄새가 치솟는 듯 하기에 내가 장난삼아 '향내 나는 우물'이라는 뜻인 향정(香井)이라 이름 지어 주었었지. 나는 그걸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그런데 그 예쁘고 곱고 어리고 착한 향정이가 말이야, 실은 여차여차하여."

두릉은 하는 수없이 어젯밤에 자신이 당했던 그 해괴망측한 일들을 간단히 요약해서 괴정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괴정은 얼굴색이 창백하게 바뀌면서 두릉에게 급히 물어보았다.

"그러면. 향정이가 어젯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렸단 말씀이옵니까"

"다섯 놈에게 당하고 나니 도저히 제 정신이 아닌 듯 했네. 완전히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던 내가 도무지 말릴 재간이 있었어야지."

두릉이 크게 아쉽다는 듯 멀거니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괴정은 그대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더니 두 주먹으로 땅바닥을 마구 쳐가며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향정이와 같은 동향(同鄕)인데다가 두릉에게 그녀를 직접 바친 일이 있었기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지금 이렇게 대성통곡을 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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