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진의 선구자' 황철 中 상하이서 촬영기술을 익히다
<4> '사진의 선구자' 황철 中 상하이서 촬영기술을 익히다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3.01.3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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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영 사진가의 한국 사진史
개화파들의 기념사진, 촬영자 미상, 1880년대.
개화파와 사진

정인영 <사진가>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나라 안팎을 묶어 놓았던 쇄국정책이 느슨해지기 시작하자 서양의 문물이 차츰 밀려들어 오더니 해외여행이 늘어났다.

서양 여러 나라에 문호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덩달아 사진분야에도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등 책들이 들어왔다.

개화사상과 서양 기술들이 쓰여진 이 책들에는 사진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를 보고 서재필, 이동인씨가 사진이야기를 여기저기에 알려주었다.

개화파인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광호, 서재필 등은 서양서적과 문물을 통해 근대화된 서양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으니 이때가 1879년경이다.

1882년 4월에는 김옥균이 일본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일본인 사진사 가이군지를 데려와 서울 남산부근에 사진관을 개업하였다.

이보다 1년 앞서 1881년 김윤식은 중국 텐진기기창의 학당에서 사진을 직접 배워와 국내에 알리기도 했다.

텐진은 중국에서 상하이와 더불어 사진에 관한한 일찍 그 기술이 전래된 지역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진수용은 외국에서 카메라를 직접 사오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오는 방식이었다.

'오세창', 촬영자 미상, 1880년대.
김용원은 중국과 일본에서 사진촬영술과 유제를 제작하는 기술까지 습득해 1883년 여름 서울 중구 저동에 촬영국과 사진관을 개설했다.

이 당시 일본인 혼다슈노스케(일본 요코하마 출생)는 김용원의 촬영국 개설을 도와준 후 서울 수표교부근에서 사진관을 개업했으며 이후 남산 기슭으로 옮겨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지금의 사진술이 우리나라에 뿌리내리는 과정이 김용원의 글로 1884년 3월 18일자 한성순보와 일본신문들에 적혀 있다.

사진촬영기술연구에 선구자라는 황철은 1882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상기(사진기계)를 구입하고 섭영술(사진촬영기술)을 익혔다.

19세기 말이래 상하이는 사진기술이 중국 어느 지역보다 발달된 곳이었는데 황철은 이곳에서 독일제 카메라와 사진재료를 구입, 사용하면서 그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1883년부터 직접 사진을 촬영했다.

황철은 서울 종로 대안동에 있는 자신의 집 사랑방 서재를 개조하여 촬영소를 개설하고 서울시내 경승지와 개화파, 개화에 적극적인 인사들의 초상을 촬영하면서 사진촬영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때 황철은 비원, 경회루, 향원정, 근정전, 인정전 등 중요 건물을 두루 찍어 풍경사진에도 기량을 발휘했다. 그 사진들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서양의 사진술이 개화파에 의해 국내에 들어오면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그것인데 황철의 사진 찍는 행위는 국가 기밀누설에 해당한다는 것이 수구파의 시각이었다.

황철은 의금부에 간첩죄로 투옥되어 중죄인이 되었다가 민비인척 민병석에 의해 석방되기도 했다.

이 때 황철과 가까운 사진가가 있었는데 그가 지운영이다. 지운영은 황철과 사진기 자재 수입에 서로 협조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시·서·화(詩書畵)에 실력이 있어 산수화와 한자서예를 남겼다.
황철 '경복궁 밖' 1880년대경.

1884년 갑신정변에 의해 사진관과 사진기자재의 파괴를 당해 고초를 겪었던 황철은 1887년 이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갑신정변 후 개화당인 황철은 1894년까지 12년동안 변혁기의 우리나라 사회의 모습을 열심히 찍어 많은 기록사진을 남겼다.

지운영이 서울 마동에 사진관을 개설한 것은 1884년 3월 16일이다.

지운영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종의 초상사진을 촬영했다.

카메라로 왕을 찍은 것은 조선왕조의 대사로 왕조의 권위를 높이고 무궁한 번영을 뜻하면서 조상을 추모하는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지운영은 고종 외에도 명성황후와 순종의 초상사진도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 때 찍은 유리원판을 6·25때까지 지운영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사변 중에 충남 공주로 피난가 있는 동안 명성황후 원판은 도난당하고 순종의 유리원판은 실수로 떨어뜨려 파손되었다.

지운영의 동생 지석영도 1880년대에 사진을 촬영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외 알려진 것은 없다.

한편 1888년에 일어났던 유언비어를 보면 사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겠다.

'서양인들이 어린이를 잡아 가마 솥에 삶아 말린 다음 가루를 내어 마법상자(카메라)에 넣어 약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서울 시내에 돌았었다.
황철 '광화문' 1880년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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