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모세의 기적 '백정 효자비'
한국판 모세의 기적 '백정 효자비'
  • 김명철 <충북도교육청 장학사>
  • 승인 2013.01.0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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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충북도교육청 장학사>

예기(禮記)에서는 ‘효’의 기본적인 도리로서 ‘부모를 섬길 때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 할 때는 즐거움을 다하고, 병드셨을 때는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지낼 때는 엄숙함을 다 해야 한다’고 하였다.

옛 부터 우리 민족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지녀왔다. 특히 효정신은 우리 민족의 삶과 전통 속에 깊이 스며들어 전통윤리의 중심축을 이뤄왔다.

‘효’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 삼국사기의 지은, 향덕, 설씨녀 등 고대국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효’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시대의 이념에 따라 내용이 다소 변화되기도 하였으나, 우리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청주 운동중학교 앞, 안쪽 마을로 들어서는 길옆에는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미터 정도 되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작은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은 조선 세조 때 백정 ‘양수척’이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비로 비록 모양과 이름은 초라하지만 그 내용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효자 양수척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선 세조 때 이 마을에 사는 부부가 늦둥이를 낳았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심지어는 부모를 때리라고 시키며 아이의 재롱을 즐겼다. 하지만 부모를 때리는 것이 버릇이 된 이 아이는 커서까지도 어머니를 때렸는데,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양수척은 학식이 높고 효자로 널리 알려진 이웃 마을 경연의 집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그는 하룻밤을 묵으며 효자 경연의 행동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경연이 어머니 보다 먼저 이불 속에 들어가 눕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본 양수척은 크게 실망하며 욕을 했으나, 한참 후에 경연이 누워있던 이불속으로 어머니를 모셔 주무시게 하는 모습을 보고 그간의 행동을 뉘우치며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양수척은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시며 효도를 다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어머니가 병이 나자 그는 마을의 개울 건너편 청주읍성 쪽에 있던 약방으로 급히 뛰어가 약을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물이 넘쳐 개울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약봉지를 손에 든 양수척이 건너편 자기 집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크게 걱정하고 있는데, 이때 갑자기 물길이 갈라져 건너갈 수 있어서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양수척은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효행이 지극하였고, 그때 물이 1척만큼 벌어졌다고 해서 수척(水尺)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교육학 용어에 ‘보편적 사회화’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사회의 공통적 감성과 신념을 새로운 세대에 내면화시킨다는 의미이다. 뒤르껭(E. Durkh eim)은 사회가 계속 동질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편적 사회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원동력이며 바탕이 되는 정신적 저력은 바로 ‘효’이다. 따라서 우리는 ‘효’를 통하여 우리 사회의 동질성을 영속시키고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을 통하여 가능하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한국에서 꼭 수입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웃어른을 공경하고 잘 모시는 풍습”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번 주말 자녀들의 손을 잡고 백정 효자비를 찾아가 보자. ‘백정만도 못한 자녀로()’ 키우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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