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함을 배우며
겸손함을 배우며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2.09.0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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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먼 곳에서 택배가 왔다.

딸아이 친구 어머니가 보내신 고춧가루다. 겹겹이 쌓인 포장을 푸니 매운 내가 풍긴다. 붉은 가루 빛이 곱디곱다.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유난히 긴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태풍에 가슴앓이 하는 와중에도 주문받은 물량을 마련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농사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때 맞춰 거두어들이는 과정에 따라 어느 정도 수고가 필요함은 알지만 파종에서 수확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어야 하는지 속속들이 알 리 없다. 게다가 애쓰지 않아도 손위 시누이 인심덕에 어지간한 채소는 얻어먹었고 고추는 친정엄마가 늘 마련해주셨으니 말해 무엇하리.

분위기를 따지며 비싼 커피를 마시고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책은 욕심 부려 사들이면서도 어쩌다 시장에 나가 채소를 살 땐 까다롭게 고르느라 뒤적이고 조금만 값이 올라도 비싸다 지나쳤다.

그러다 이사를 하는 바람에 호박잎 하나도 사먹는 처지에 이르고 보니 채소 값 오르내림에 바짝 긴장한다.

어느 날 부터인가 정가 뉴스보다 농산물 관련 뉴스에 관심이 쏠리고 더불어 농부들의 수고와 아픔이 보였다. 그 뒤론 시장에 가면 채소 값을 깎을 수도 덤을 바라지도 못했다. 비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달큰한 과일 냄새 속에, 소쿠리에 담긴 오이꼭지 끝에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들이 녹아 있음을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나는 재미로 베란다에서 채소를 기른다.

주유소에서 나눠준 씨앗들을 빈 화분에 뿌려놓으면 실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가끔 한 끼 밥상이 된다.

봄에는 상추, 쑥갓, 겨자채, 여름에는 열무, 얼가리 배추를 심는데, 물주기를 잊고는 시든 푸성귀들이 소생하지 못할까 발을 동동 구른 날이 다반사다. 기른 시간에 비해 먹는 건 잠깐이라 가끔은 아깝다.

얼마 전엔 처음으로 시금치 씨앗을 심었다. 한쪽 화분에 심은 시금치가 본 잎이 세 개 나오도록 한쪽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씨앗구실을 못하나보다 모종삽으로 긁적거려 다시 배추씨를 뿌리는데 뒤집힌 흙더미 불거진 보라 빛 씨앗마다 희끄무레 싹이 보였다. 어찌나 미안했는지….

생각 없이 깊이 심어놓고 투정을 부린 거다. 기다리면 다 나온다던 남편 말을 못 믿고 흙을 헤집어 버린 일이 후회가 되었다.

그런 기다림을 왜 잊었을까. 한 뼘 공간 안에서 재미로 기르는 일도 늘 인내와 관심이 필요한데 업으로 삼아 상품을 만드는 노고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삼년 가뭄은 견뎌도, 한달 홍수는 못 견딘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홍수 피해는 견디기 힘들다는 말일게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마다 고인 한숨과 신음에 아프다. 하지만 한쪽에선 무너진 자리마다 다시 기둥을 세우고, 갈무리하고, 또 한쪽에선 낙과 판매를 서로 도우면서 흩어진 마음들을 하나로 묶는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거친 세상이지만 서로를 잊지 않고 따뜻하게 껴안는 지혜와 오늘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겸손함을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새삼 배운다.

가을 햇살이 내내 은혜롭기를 기도하며 저녁엔 고맙고 귀한 고춧가루로 겉절이 맛깔나게 버무려 상에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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