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자살과 깨진 유리창 이론
청소년 자살과 깨진 유리창 이론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7.05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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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괴테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38년 전인 1774년의 일이다. 역사는 그로부터 벌써 두 번의 세기를 지나 세 번째 세기를 살만큼 쌓여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그 소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발표 당시인 18세기에 이미 5개 국어로 번역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이 소설로 인해 모방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는데 이를 일러 '베르테르 효과'라 부른다.

그 배경에는 이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가 다른 사람의 약혼녀 로테를 사랑했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자살을 택한 비극이 있다.

기성세대가 학교폭력이 그 근본적인 이유라고 둘러대기에 전혀 망설임 없는 청소년 자살이 급기야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한 어린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자살예방협회, 보건복지부는 지난 2004년 언론의 신중한 자살보도를 위해 윤리강령과 자살보도 권고 기준을 마련한 바 있다. 이 권고기준에는 공공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자살에 대한 보도를 자제할 것을 비롯해 자살경위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을 것, 자살동기를 단정적으로 보도하지 말 것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기준을 감안하면 나 역시도 청소년, 더구나 어린이의 자살에 대한 글을 쓰는 일조차 자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한 여자 어린이의 죽음에 대한 기사역시 "평소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 성적도 중상위권이었다"거나 "왕따나 학교폭력 정황은 없었다"는 등 소위 경쟁교육의 서열화 또는 폭력이 동원되는 외부적인 작용으로 인한 탓으로 일관하는 언론의 자세는 참으로 안타깝다.

청소년들은 아직 경쟁과 사회적 관계망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런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어른들의 잣대로 그들을 예단하면서 청소년들과의 벽을 높여가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 마땅하다.

개성과 서로 다른 능력, 그리고 창의력은 아예 무시된 채 시험문제에만 목을 매는 청소년들에게 문화 다양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 땅에 태어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대학을 가야하고, 대학을 졸업한 마당에 그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구직난과 구인난을 동시에 만드는 건 아닌지. 그리하여 청년실업이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부작용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여기는 심각한 고민이 절실하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박물관 견학내내 무릎을 꿇고 다닌 19세기 미국 유아 교육자 '피바디'여사의 일화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 '눈높이'가 사교육의 성공신화로 엉뚱하게 대접받는 한국 교육의 기현상은 바로 잡아야 한다.

지난해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성공적으로 치른 옛 연초제조창 건물에는 아직 깨진 유리창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은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직 깨진 유리창이 남아있는 옛 연초제조창은 내년에도 공예비엔날레가 개최되면서 문화와 예술을 통해 맑고 완벽한 유리창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런 문화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서 청소년들이 마음껏 호흡하면서 새로운 기쁨을 만들어 주는 것은 당연히 어른들의 몫이다.

그런 문화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은 청소년들의 희망이요, 억눌림에서 해방되는 탈출구가 될 것이다.

시험 때면 늘 그렇듯 오늘 아침에도 기말고사의 중압감에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놓는 내 막내딸과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을 함께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것이 고작인 아비와 어른으로서의 내가 참으로 궁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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