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碑木)
비목(碑木)
  • 문종극 기자
  • 승인 2012.06.24 2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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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문종극 <편집국장>

6·25한국전쟁이 끝난 후 10여년 뒤에 초급장교로 최전방에서 복무한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64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ROTC 2기 소위로 임관, 전방에서 근무 중 비무장지대를 순찰하면서 무명용사 수백구의 해골을 접한다. 그는 그곳 막사주변 빈터에 채소를 심을 요량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 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오는 것을 목도한다. 땔감을 만들기 위해 톱질을 하면 종종 톱날이 망가지면서 파편이 나오는 것도 경험했다. 그런가 하면 주변 계곡과 능선 곳곳에 썩은 화이버(fiber), 탄띠 조각, 녹슨 철모 등이 나뒹구는 것도 흔하게 봤다.

그 자리에서 족히 몇개 사단 젊은이들이 죽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막힌 전쟁터를 그가 목도한 셈이다. 그는 어느날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썩고 총열만 남은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웠다. 깨끗이 손질해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한 끝없는 공상을 이어갔다. 전쟁 당시 카빈의 주인공이면 물론 소대장이고 계급은 소위였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지금의 자신과 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그가 옛 격전지에서 이런 젊은 비애를 앓던 어느날, 잡초 우거진 산모퉁이의 양지바른 곳을 지나다가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본다.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은 보이나 이끼가 덮힌 세월의 녹이 쌓였고 푯말인 듯 나뒹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무덤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2년 후 그는 정들었던 그 능선을 떠나 전역을 한다. 전역한 그는 음악PD로 TBC에 입사한다. 당시 그는 우리 가곡에 심취한다. 그쯤 그는 운명적 만남으로 작곡가 장일남을 만난다. 그는 장일남으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는다.

그때 그는 첩첩산골의 이끼덮인 돌무덤과 그옆에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을 떠올린다. 화약냄새가 쓸고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의 주인공인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새하얀 산목련.

불멸의 가곡 '비목(碑木)'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여/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우리고장 충북 충주출신으로 '비목'을 작사한 한명희씨의 이야기다. 나무로 된 비(碑). 전쟁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전우를 땅에 묻고 나무로 비를 세운 다음 그 위에 철모를 씌워놓고 거수경례하던 그 모습이다.

그렇게해서 탄생한 비목은 서정적이면서 애절한 시다. 그 시가 장일남 작곡가를 만나 단조의 고독, 우수를 담아낸 불멸의 가곡으로 탄생한 것이다. 비목의 곡과 노랫말은 무명용사를 지칭한다.

그렇게 스러져간 무명용사 1만8000여명이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채 어딘가에 묻혀있다고 한다.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덕분에 2만여명 중 2000여명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도 발굴되지 못한 무명용사들은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가 너무도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혀 있는 것'이다. 육신없는 영혼이지만 얼마나 그립겠는가. 두고온 고향 부모형제가, 그리고 초동친구들이. 그 그리움이 마디마디 낀 이끼로 변한 것이다.

오늘은 6·25전쟁 62주년이 되는 날이다. 정부가 국군 유해발굴에 좀 더 박차를 가할 일이다. 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가족이 전사통지를 받지 못한 용사, 보훈조치까지도 유보된 무명용사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아 예를 갖춰야 한다. 이와함께 60여년 애타게 소식을 기다려온 전사자의 가족들에게도 국가적인 예를 표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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