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7.1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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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대문 앞에서 어김없이 벨을 누른다. '아, 집에 아무도 없지.' 이내 깨달으며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인자 오냐. 애들 썼다." 흘리듯 들어왔던 어머님의 반김소리가 들리는 듯 해 방문을 열어보지만 휑하니 빈방이다. 소파에 앉아 정리된 거실의 적막한 기운을 감지하며 어머님의 부재를 확인한다. 외출했다가 언제 돌아와도 반색하며 맞아 주시던 분, 십년이 넘도록 한솥밥을 먹으며 노년의 담백한 삶을 가르쳐 주신 시어머니께서 몇 달 전 둘째 형님댁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십 수 년 전, 의지하며 함께 살던 큰아들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 때 어머님은 우리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 딱 한 번 그러시고는 서운한 내색도 안하시더니 당신의 고향 비슷한 시골, 셋째 아들네인 우리 집에서 살기를 자원하셨다. 그것은 아마 허허로운 가슴을 다독일 수 있는 어머님의 유일한 방편이셨을 것이다.

시골 우리 집으로 오신 어머님은 나에게 갑작스런 짐을 주었다고 미안해하면서도 만족하시고, 심신이 건강해지셨다.

덕분에 우리 부부가 효자효부로 집안에서 칭송을 받았지만, 그건 순전히 어머님 자신의 지혜로운 행복 찾기였음을 우리는 안다.

어머님은 몇 년째 묵혀 있던 텃밭을 일구어 갖가지 채소를 가꾸며 떠나간 큰아들네를 향한 그리움을 묵묵히 삭히셨으리라. 넓은 마당 빙 둘러 손자들 좋아하는 옥수수를 심어 시원한 울타리를 만들고, 여름내 먹을거리를 장만하시기도 했다. 잡초하나 생길 틈 없이 화단을 가꿔서 때마다 예쁜 꽃들을 피워 내 우리집 어린 남매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셨던가.

결혼 초부터 어머님을 모시고 산 것이 아니었기에 내 마음에 부담이 적지는 않았다. 더욱이 깔끔맞고 까탈스러운 내 성격과 넉넉하고 털털하신 어머님의 성품이 한데 어우러지기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내가 갈등하며 흘렸던 눈물보다 어머님의 조심스런 가슴앓이는 더 크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큰 생각으로 품어주신 분이셨기에 '세상에서 가장 모시기 쉬운 시어머니'라는 별칭을 내게서 듣게 되셨고, 나도 어머님처럼 곱고 넉넉하게 나이 먹어가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 하셨다.

열일곱 나이에 딸까지 하나 딸린 홀아비에게 재취로 시집을 오셨다는 어머님. 호된 시어머니 시집살이와 가난의 시드러운 삶속에서도 예민한 성격의 전실 딸을 친 자식들보다 귀하게 키우셨다고, 어머님 자녀들은 원망 반 자랑 반으로 얘기한곤 한다. 공부는 엄두도 못 내게 했던 가난이 평생 한이었다는 어머님은 그 들꽃 같은 인내와 넉넉함을 어디서 배우셨을까.

내 생일이면 하얀 봉투에 지폐 몇 장을 넣고 겉면에 '고마운 우리 며누리 생일 추카'라고 연필로 꾹꾹 눌러 쓰셨던 어머님의 필적은 글자마다 살아나 내 가슴에 감격이라는 수를 놓았다. 세살 때부터 어머님과 한 방을 쓰며 중학생이 된 우리 딸아이는 여유롭고 낙천적인 성격이 어찌 그리 할머니를 빼 닮았는지 가끔씩 나를 실소하게 한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애썼다고, 형님네가 어머님 모실 여건이 되어서 모셔간다지만 내 짐을 덜어주고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는 어머님의 깊은 속을 알기에 송구하고 고마운 마음이 나를 아프게 했다.

웬만한 것은 다 챙긴 후, 나머지는 동서가 알아서 처분하라는 형님 얘기에 고개만 끄덕일 뿐인데 내 귀에 대고 나직이 하시는 말씀. "에미야, 내 물건들 그냥 둬라. 언제든 와서 또 쓸 것인게." 다시 돌아오고픈 소망도 있으시지만 허전할 며느리를 위로하고 배려하시는 마음인 것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안다. 그것이 평소 그 분의 신앙이고 성품이셨으니까.

몇 달 새 조금씩 어머님의 빈자리를 인정하며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린다. 여전히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내 걱정 말라며 전화 받으시는 어머님, 그 음성이 너무 쇠약해지기 전에 그토록 편안해 하셨던 당신의 자리로 다시 모셔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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