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유감(洛花 有感)
낙화 유감(洛花 有感)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5.24 2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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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취재2팀장(부국장)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열흘 붉은 꽃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장 건물이 죽 늘어선 길옆에 코끝이 찡할 만큼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아카시아 흰 꽃이 속절없이 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꿀을 머금었던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축 늘어지더니 이제는 그 꽃들이 다 지고 말아 아스팔트 위에 하얗게 꽃가루가 되어 함부로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 사이 배고픈 시절 하얀 쌀밥을 떠오르게 하면서 서러운 봄날을 기억하게 했던 조팝나무 흰 꽃도 일찌감치 사라지고, 이제 찔레꽃이 그 날카로운 가시를 헤치고 하얗게 들판의 허전함을 채우고 있습니다.

지지 않는 꽃은 없습니다. 평생을 나무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대신 꽃은 때가 되면 나무와의 자연스러운 별리(別離)를 선택합니다.

향기로 교태로 벌 나비들을 유혹해 성스러운 수정을 마친 꽃들은 열매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낙화(洛花), 그 장엄한 추락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시인 조지훈은 '낙화'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꽃이 지면 열매는 드디어 세상과 만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잎들은 더욱 맹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스러진 꽃들은 다시 제 뿌리에게로 다가가 자양분이 될 터이니, 지는 꽃을 마냥 서운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거기에서 생명의 윤회는 거듭 이어질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번식의 힘에 대한 경이로움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마냥 서러워 할 일만은 아닙니다.

올해는 유난히 꽃들이 철모르고 피어납니다. 그리하여 곱게 맺힌 꽃망울을 관찰하며 활짝 피는 날을 기다리기 보다는 하늘거리며 난 분분 추락하는 꽃잎들이 꽃비처럼 날리는 모습이 더 익숙합니다.

날이 갑자기 뜨거워진 탓이겠지요. 그리고 그토록 제 철을 지키지 못하고 뜨거워진 날들은 사람들의 악착같은 욕심 때문일 겁니다.

나누어 주지 못하고 앙탈하며 제 자리만을 차지한 채 버티고자 하는 사람들의 끝 모를 욕심에서 우리는 꽃이 꽃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고귀한 내어놓음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인 이형기는 거듭 노래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불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꽃이 내어 놓은 자리에 이제 열매는 무르익을 테고, 잎들은 오월의 싱그러운 햇살을 듬뿍 받으며 더욱 풍성해 질 테지요.

그 무섭도록 짙푸른 숲 속에서 떠나보낸 꽃들을 서러워 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잎 한 잎 꽃잎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 잔해들은 추억이 되어 조용히 근원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떠나야 할 때를 알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버티면서 무조건 매달려 있기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이 더 큰 죽음이 아닐까요.

꽃이, 나무가, 그리고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위대한 순환의 진리를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법.

차라리 나뭇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위태롭게 살아남는 것 보다는 헤어짐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자유로운 낙하가 더 희망일 것입니다. 이제 3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슴 깊은 곳으로 떠나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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