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빈자리
5월, 빈자리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5.17 2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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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취재2팀장(부국장)

그 날 이후, 어떤 이에게는 5월이 영영 다시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살아남은 다른 이의 가슴에는 온통 5월만 남아 있다.

벌써 32년. 그날 우리는 아카시아 꽃향기에 실려 남쪽에서 날아오는 수상한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했고, 같은 땅덩어리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 온 사람들의 양심을 의심했다.

정전협정,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엄연함에도 철모와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총구는 남쪽으로 향했고, 헬리콥터는 남쪽으로 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순진한 사람들은 영원한 우방이며 아름다운 나라 미국이 총과 몽둥이로 무장한 채 백성을 난도질하는 군인들의 살생을 막는 도움을 주기 위해 항공모함을 이끌고 찾아 올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광주, 그 빛고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충청도며, 경상도, 서울에서도 순박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피 토하며 민주주의에 대해 함께 울부짖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사람이 한 짓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은 총과 몽둥이, 그리고 총에 꽂혀 있는 시퍼런 칼날에 포위돼 있었다.

육지였으나 고립무원으로 갇혀진 섬, 그리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벽으로 단절된 그곳에서 갑자기 울려 퍼진 애국가는 발포의 신호였고 비극이며 민주주의가 함께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그 해 5월 17일. 계엄사령부에 의해 내려진 보도통제지침에는 정부를 비방하는 내용이거나, 반정부 혁신노선에 대한 주장을 선동하는 내용, 비상계엄령 선포와 포고령 위반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에 대한 보도는 금지됐고, 보도처 위반 시 폐간이라는 섬뜩한 내용까지 포함돼 있으니, 눈 막고 귀 막은 독재의 그늘은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32년. 한 세대가 흘렀고, 그 해 5월 태어난 아이는 지금쯤 막 가정을 이루었거나 결혼을 준비하고, 또 어떤 이는 청년실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탄식하고 있을 터.

그 사이 우리는 활짝 핀 민주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당당함으로 32년 전 그 해 5월의 참혹함을 잊고 있다. 아니 어쩌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으로 스스로 그 해 5월의 잔인함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나아지고 어떤 것이 좋아진 것인지 아직 분간하기 쉽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에 대한 정황은 속속 드러나고, 그 인권이 사정없이 짓밟히는 시대임에도 우리는 그 불행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외면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만 백성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백성이건 지도자가 됐든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는 인권유린은 비극이다.

그리고 그토록 자유를 만끽하고, 민주주의를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는 지금. 혹여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보도지침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알아서 기는 식으로 길들여져 잔뜩 굽은 잣대를 들이대며 권력에 굴종하는 것이 작금의 언론 현실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5월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바위섬'을 부른 가수 김원중이 다시 '오월의 노래'를 부른다.

그 공연장에는 스무 자리의 객석을 빈자리로 남겨 놓는다는데, 그 빈자리에 오월의 넋을 초청하는 상징적인 의미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정작 그 빈자리에 초청받아야 할 것은 오월의 넋이 아니라 이 땅의 피 흘림과 그 해 5월, 세상의 빛이 되었던 민초들의 눈부심을 잊고 살아 온 우리 자신이 아닐까.

모진 세상 살아가면서 어찌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 기억하면서 잊지 않기 위해 눈 부릅뜨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마는, 바위섬은 세상 사람을 모두 물러가게 하는 폭풍우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법.

5월에는,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가볍지 말자, 가볍지 말자며 스스로 다짐해 오건만. 잊고 지낸 많은 그리움들이 빈자리를 새삼스럽게 채우는 부끄러움으로 멍드는 가슴을 어찌 달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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