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의 폭로전
불교계의 폭로전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5.1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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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불교를 일러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참된 나의 모습(眞我)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다. 맑은 우물에 비치는 온갖 것들은 물의 본성과는 상관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출렁임은 바람으로 인함이고, 나뭇가지와 파란 하늘이 비치는 것 또한 물이 갖는 특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막한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화두(話頭) 붙들고 끊임없이 허상과 망상의 안개를 걷어내며 '나'라고 하는 진면목을 찾기 위해 죽비를 맞아가는 육체의 고통도 감내한다. 삼라만상은 모두 인(因)의 결과일 뿐이다. 희로애락 애오욕(喜怒哀樂 愛惡慾)의 감정 또한 파문일 뿐 인간의 본성은 아니다.

그래서 업장(業障)을 소멸하기 위해 절연(絶緣)하고, 삭발한 채 고즈넉한 산사(山寺)에서 수행하는 스님을 보며 속인들은 공경심을 갖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빔(空)을 위해 사는 스님의 삶은 물욕과 쾌락에 젖어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청정수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절간의 삶과 살림살이가 속인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절간이든 교회든 사람 사는 세상에 방정하지 않은 한두 명이 전체 물을 흐리고 있다는 생각에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을 달며 대자대비한 부처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중생이 많다.

그러나 요즘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담배 물고 도박하는 스님의 동영상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이어서 비구니 성폭행설부터 룸살롱 출입과 성매매 등 입에 담기 어려운 폭로전에 그간 공경했던 스님의 허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의 주지라는 것에 일반인의 분노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성직자가 공경받는 것은 높은 도덕성을 갖고 있다는 일반적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면 시정잡배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가사와 장삼을 걸치고 거룩한 말씀을 대중 앞에 툭 던지며 자신은 마치 구름 속의 선인 인양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실망감이다.

물론 불교가 부처를 믿는 종교는 아니다. 부처가 되기 위한 종교이기에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 또한 인간 본성의 나약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사태는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도를 넘었다. 주지 자리를 놓고 조계종 수뇌부와 불만세력 간의 알력 다툼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금전적 이해관계가 바탕에 깔려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는 속인의 작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참선과 경전 공부를 통해 생활 속에서 부처를 닮아가기보다는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대중의 불신에 사로잡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꼴이 되었다. 수행보다는 궁합과 사주를 봐주는 데 더 열심인 스님도 있고, 산천경개 좋은 곳에서 무위도식하며 철 따라 신도들이 넣어주는 불전함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스님도 있다.

곪아 터진 사건을 위해 조계종 총부원장 자승 스님을 비롯한 30여 명이 108배 참회 정진을 하지만 깊은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는 쉽게 가시질 않는다. 이 사태를 계기로 불도들을 위한 불교계의 맹성(猛省)이 필요하다.

부처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음을 알고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설법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는 말씀처럼 스님이 등불이 될 수 없고, 절이 등불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거울로 삼고, 부처의 가르침을 화두로 묶어 부단한 용맹정진을 통해 청정무구(淸淨無垢)의 마음 밭을 가는 것이 곧 내가 부처가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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