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그 무형의 재산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그 무형의 재산에 대하여
  •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2.05.0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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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이번에는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똑 떨어지는 정의를 내렸다고는 할 수 없는, 살면서 늘 안고 살아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 무엇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정서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말로 말문을 엽니다.

전에 '정의(正義)'에 대해 글을 쓸 때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언젠가 사랑과 정의에 대해 들은 말이 기억납니다.

'정의 없는 사랑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어서 위태롭고, 사랑 없는 정의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어서 위험하다'는 말인데,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적 판단을 통해 존재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을 꿈꾸는 것이 이즈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또는 그것이 부정되는 형태의 사랑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수많은 비극이나 불행이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살면서 제법 많이 보아온 까닭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성격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을 했는데, 그러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언어 정서에서의 사랑과 영어권 언어에서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그것에서의 사랑이 각각 품사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사랑은 주로 동사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구체적 실천으로만 사랑이 가능하고, 그래서 어떤 경우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식의 '사랑한다'는 말은 거의 없고,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확인의 경우 이 낱말을 쓰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그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의 언어가 아니라는 특성을 지니기도 하기 때문에 아주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차원 높은 실천으로서의 표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의 사랑은 명사적 성격을 보입니다.

명사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주어일 수 있다는 문법적 경향을 보일 개연성을 갖고 있음을 말하는데,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일이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희곡이 두고두고 명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랑이 형용사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건데, 직접적인 표현이 거의 없다는 것, 아리랑의 한 대목에서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하고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겨우 방긋하면서 표현한다'는 것이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갑돌이와 갑순이'도 같은 맥락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분류가 의미없는 현실이 된 마당에서 다시 짚어보는 '사랑', 그것이 한 때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지만, 지금은 거기서 더 나아가 존재의 진실을 인정하고 그 존재를 축하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요즈음입니다.

거기서 경험할 수 있는 신비와 황홀, 그리하여 다시 내일을 꿈꾸게 하고 삶을 빛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그 사랑의 기반은 아무래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줄 아는 품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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