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乙) 있어야 갑(甲)도 있는데
을(乙) 있어야 갑(甲)도 있는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4.23 2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대한민국에서 갑(甲)이 아니라 을(乙)의 입장으로 산다는 것은 불편과 모멸을 넘어 때로는 재앙에 가깝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갑과 을이 한쪽이 생사여탈권까지 틀어쥐는 주종(主從)의 관계로 발전한 곳이 사채시장이다. 돈을 갚지 못한 여대생은 사채업자의 요구로 유흥업소에 취업했다. 업자는 300만원 빌려주고 5배가 넘는 1600만원을 받아내고도 룸살롱에서 일하는 것을 부모에게 알리겠다며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다.

노래방 도우미를 시키기 위해 임신한 주부를 강제로 낙태시키기도 했다. 주먹질과 성폭행은 보편적인 추심 수단이었다.

연 3000% 이자를 받아낸 업자도 있었다. 그래도 피해자들은 업자의 횡포를 고스란히 감수했다. 사람들은 당한 사람들에게 혀를 찬다. 경찰에 신고를 하든지 해야지, 덜떨어진 사람들 아니냐고. 그러나 그쪽 계통을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사채업자들에게 당해보지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도 다를 바 없다. 경기는 바닥을 치는데도 목좋은 상가 건물의 임대료는 매년 오른다. 건물주에게 애걸해봐야 재계약 싫으면 나가라는 콧방귀만 돌아온다.

상가임대차보호법도 법망 피하는데 달인이 된 건물주에겐 휴지조각일 뿐이다. 건물주에게 부과된 환경개선부담금을 세입자들이 분배해 납부하는 곳도 부지기수다. 건물주의 세금까지 대신 내주는 상인들은 싫으면 나가라는데야 도리가 없지않냐고 하소연한다.

학교에서도 무조건 갑이 돼야한다. 만약 학교를 장악한 일진이라는 갑에 찍혀서 을이 돼버리면 그날부터 생지옥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일상적인 학대에서 벗어나려면 '거꾸로 매달아놔도 교무실 시계는 돌아간다'며 이를 악물고 졸업할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죽음으로 항변하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공부를 잘하면 학교에서 보약도 지어주고 기숙형 학원도 보내주는 갑이 되는데, 일진들은 학교가 애지중지해 뒷탈이 걱정되는 이런 갑은 건드리지 않는다. 학교에서 갑이 누릴수 있는 중요한 특권 중의 하나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자식을 을로 만들지않기 위해서 빚을 내서라도 사교육을 시키고 대학을 보내는지도 모르겠다. 돈이 많아 자식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사채시장에서 을이 될 염려가 없는 사람들도 자식이 예체능 대학을 지망하는 경우에는 본인들이 을이 돼야한다.

특히 자식이 실력보다 부모의 재력에 기대 명문 예술대를 욕심낸다면 언제든지 지갑을 열고, 때로는 모멸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한다.

물론 이 때의 갑은 입시에서 실기시험을 채점해 당락을 결정짓는 해당 대학의 담당 교수다.

한 부모는 시간당 15만원짜리 불법레슨에서 시작해 교수가 쓰던 싸구려 짝퉁 악기를 1억8000만원이나 주고, 사야했고 합격 사례금으로 8000만원을 건넸으며 최신형 휴대폰까지 사다 바쳤다. 그래도 갑의 요구를 다 들어줄 능력이 되는 이 부모는 행복한 을이다.

대기업과 하청기업, 사용자와 계약직 근로자, 본사와 대리점, 연예기획사와 연습생 등등 이 나라에서 설정된 갑을 관계의 대부분은 상생과 윈윈과는 거리가 먼 일방적 관계이다.

갑과 을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곳도 있지만 역전의 감동은 없고 악취만 풍긴다.

인허가권과 단속권을 행사하며 갑의 지위를 누리던 공무원이 을로부터 봉투를 받는 순간이 그렇다.

물이좋다는 서울 강남의 한 경찰서 지구대가 유흥업소에서 매월 수천만원씩의 상납금을 받아온 사실이 드러났다.

한때 갑이었던 이들은 돈받은 업소에 단속 정보를 신속히 알려주고 문제가 생기면 뒷처리를 해주는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지구대 소속 경찰관 수십명이 모두, 단 한명도 거부하지않고 갑으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을 포기하고 기꺼이 을을 선택했다.

우리 다함께 '개처럼 벌어' 진정한 갑으로 재탄생하자며 결의대회라도 열었던 모양이다.

경찰에 뇌물을 바칠수 없는 영세상들만 단속에 떨어야하는 진정한 을이 되는 셈이니 이들의 관계는 갑과 갑의 야합으로 봐야 정확하다.

너나없이 을에게 군림하는 갑이 되기위해 혈전을 벌이는 시공간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역사는 갑과 을의 투쟁이 임계점을 넘으면 칼바람을 불러오기 일쑤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