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4.19 2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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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취재2팀장(부국장)

사천동 성당 옆으로 난 좁다란 길은 내가 즐겨찾는 새벽 산책길입니다.

높게 치솟은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을 뒤로하고 굴다리 두개를 지나면 옛 발산리로 이어집니다.

굴다리 두개를 지났을 뿐인데 그 짧은거리 사이에 놀랍게도 도시의 각박한 모습은 이내 사라지고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이 나타나던 이 길이 나는 좋습니다. 거기에는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논이 있고, 조그만 과수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좁다란 길 양쪽은 하나, 둘씩 터를 차지한 공장들에게 점령되고 말아 쓸쓸합니다.

아! 그래도 이 봄, 나를 몹시 설레게 하는 것은 삭막한 공장과 공장 사이에 손바닥만 하게 남아 있는 작은 논, 그곳으로 졸졸 소리내며 여전히 물이 흘러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논둑에는 민들레며 참소리쟁이 등 작은 풀들이 수줍은 노란 꽃과 푸른 잎들을 자랑하고 있고, 그 논에 지금쯤 어느 농부가 희망을 흐르게 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일과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일은 따지고 보면 두루 먹고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늙은 농부가 설자리를 잃고, 그 보다는 훨씬 젊은이들이 회색 공장건물을 차지하고 있음은 어쩐지 우울합니다.

얕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무심천과 만납니다. 그곳에 꺾여진 채 무수히 버려진 벚꽃가지는 나를 슬프게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무심히 꽃을 꺾는 이들이 대부분 젊은이로 변했습니다. 꺾은 꽃을 머리에 꽂고 사진 한장을 찍어 추억으로 남긴 뒤 버리는 마음에 공동선은 없습니다. 잔인하게 버려진 쓰레기 역시 대부분 젊은 사람들의 흔적입니다. 거기에는 도덕은 이미 아랑곳 없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제는 4·19 혁명기념일이었습니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4·19의 숭고한 뜻에 무관심하다는 신문기사가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없이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지를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을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구,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철학자 강신주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다'고.

다시 무심천을 되짚어 발산리로 가는 길. 이제는 군데군데 조금만 남아 있는 논밭이 서글픈데 나이 탓인가요. 어느 젊은이가 무심천에 함부로 버렸을 튀김닭 포장지 BBQ가 자꾸만 BBK로 잘못 읽혀집니다. 도덕은 희미해지고, 또 침침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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