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의식
성스러운 의식
  • 이용길 <시인>
  • 승인 2012.04.09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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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용길 <시인>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린다. 새싹에 떨어지는 비는 연둣빛이다. 이른 아침 어둠조차 끌어안은 안개도 봄을 부르는 손짓을 하는 것 같다. 유리창문을 열어 본다. 연둣빛 바람이 춤을 추며 가슴을 뒤흔들고 지나간다.

이맘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손 없는 날이면 우리 집은 장 담그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겨우내 우리 집 윗목에 자리 잡고 있던 메주가 봄볕을 보는 날이기에 어머니의 손길은 바쁘셨다. 딸이 없는 우리 집에선 어린 내가 딸 노릇을 도맡아 해야 했다.

갈라진 메주 사이로 보이는 하얀 곰팡이, 어머니는 나에게 그 곰팡이를 살살 달래듯 칫솔질을 하라고 시키셨다. 어린 마음에 그 곰팡이가 내 손에 묻을까봐 내심 싫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어머니에게 늘 들켜 걱정을 듣고는 했다.

하지만 메주의 칫솔질은 성스런 의식을 치르는 일처럼 막내 아들인 내가 꼭 했다.

반짝 반짝하게 닦아 놓은 독에 짚 연기로 소독을 하고 메주와 소금물 그리고 숯과 빨간고추 그리고 눈처럼 하얀 찹쌀가루와 붉은 고춧가루, 콩이 버무려져 독을 채우고 나면 어머니는 그 독을 닦고 또 닦아 볕이 잘 드는 장독대로 옮기셨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고추장, 된장, 간장. 그 맛은 언제나 일품이었다.

오늘 문득 장 담그던 일이 생각났던 것은 순전히 봄을 재촉하는 비 때문이었다. 한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그 성스러웠던 장 담그기. 오늘은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는데 하루의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구수하고 정겨운 엄마 표 음식이 더욱 그리운 날이다.

오늘도 혹시 아들이 오지 않을까 혼자 목 빼고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구수한 된장찌개를 어머니와 함께 먹고 싶다. 그리고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 "어머니가 해 주시던 된장찌개가 최고였어요"라고 말하고 싶다.

훌쩍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고 그러다 영영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밖의 봄볕은 어느새 살가운 포옹을 하려 하지만 실내에선 아직 뜨거운 난로의 훈기가 좋다. 가끔씩 시선을 끌기 위해 난로의 불이 괴성을 지른다. 마치 자기 좀 보아 달라 한번씩 소리치는 것처럼 보여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나무 타는 냄새가 좋다. 식사가 끝나고 진한 된장찌개 냄새를 묻혀 와서 난로 옆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오늘은 더 정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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