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소녀 경찰서장
멕시코의 소녀 경찰서장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3.2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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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지난 2010년 10월 미국과 접경한 멕시코 소도시 '게라로'에서 20살짜리 여대생이 경찰서장에 취임했다.

이 도시는 마약조직들이 세 확장을 위해 대낮에도 총격전을 벌이는 무법천지로 유명했다. #멕시코의 소녀 경찰서장

전임 경찰서장도 마약조직에 살해됐다. 서장 자리가 공석이 된후 1년이 넘도록 경찰 내에서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시장은 민간으로 눈을 돌려 유일한 지원자인 이 여대생을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취임사에서 "법과 질서를 되돌려 놓겠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마약조직의 살해 위협을 견디지못해 이듬해 6월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그래도 8개월이나 자리를 지켰으니 대단한 투혼을 발휘했던 셈이었다. 철부지 소녀에게 지역의 치안을 맡기고 방관해온 시장을 포함한 이 도시의 어른들은 범죄조직의 협박을 받다못해 망명길에 오른 소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가 '3000만원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공약을 파기한 것과 관련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선관위 기탁금 1500만원을 내고 나면 더 이상 선거운동은 불가능하다"며 공약 파기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손 후보가 공약 파기의 이유로 언급한 기탁금 1500만원은 중앙당이 지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체 자금 3000만원에 중앙당 지원금이 보태지고, 각계에서 답지한 후원금 8000만원도 쓰겠다는 작정이니 선거비용 면에서 다른 후보자들과 차별화될 여지가 없어졌다. 선거자금의 출처라던 전세집(원룸)도 공개된 손 후보의 재산내역에 그대로 남아있어 거짓말 시비를 낳았다.

우선 손 후보를 국민을 감동시킨 개혁공천의 상징으로 치켜세우며 열광했던 새누리당이 머쓱해졌다. 부산까지 내려가 함께 퍼레이드까지 벌인 박근혜 위원장도 김이 새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신하고 패기만만했던 손 후보에게서 정치의 미래를 기대했던 일반 유권자들도 여당못지않게 착잡한 심경이 됐다. 잘못했다고 비난하자니 고군분투 중인 20대 정치 초년생에게 가혹한 처사같고, 관용하자니 배신당한 듯한 서운한 감정이 돋아난다.

"(3000만원 공약을 지키기에는) 상대와 제대로 대결해야 하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다음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아직까지 전세권 명의가 돼있다" 등의 구구한 해명에선 기성 정치의 손때가 묻어나 실망감이 깊어진다. 그러나 "나 혼자 총선을 다 치르는 것 같다", "각오가 돼있으니 마음껏 때려라"하는 대목에서는 '정치개혁의 상징'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자신을 재단해온 세상에 대한 항변도 읽혀진다.

새누리당이 야당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의 지역구에 27세 여성 손수조를 전략공천한 것은 이곳의 승부보다 선거 전반에 여당 바람을 일으켜줄 '흥행'을 위해서 였다. 실제로 손 후보는 새누리당이 공천경쟁에서는 야당보다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데 기여했다.

그에게 내려진 과제는 이같은 역할을 다한 후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짐작컨데 선거기간 그의 용도를 최대화하기 위해 주변에서 이런저런 망상을 심어줬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애초의 소신은 차선으로 밀렸을 것이다.

쇄도하는 비난에 대해 손 후보는 '선한 동기가 단기간에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있다'는 까뮈의 말로 답했다. 까뮈가 그런 말을 했다면 '동기가 훼손되지않도록 과정도 오점없이 철저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았을 것이다. 검증 불가능의 동기만 강조하며 잘못된 행위를 변명하는 것은 기성 정치인들의 상투적 수법이다. 국민들은 동기가 훌륭한 정치인이 아니라 과정에 충실하고 책임지는 정치인들에 목말라 있다.

손수조에 대한 비난은 중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가 강조한 '선한 동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지켜갈 수 있도록 정치권은 물론 언론이 관심을 거둬주는 것도 필요하다. 손 후보가 더 추락하면 우리 모두에게 깊은 자괴감을 심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물정모르는 소녀를 범죄소굴의 경찰서장에 앉혀놓고 영웅이 되길 기다렸던 멕시코 어느 도시의 비겁한 시민들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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