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복장 터트리는 '유산다툼'
서민 복장 터트리는 '유산다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3.19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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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화재가 난 빌딩을 지나가던 거지가 곁에 있던 아들에게 넉살좋게 말한다. "아들아 우린 저런 건물은커녕 집도 한채 없으니 평생 불 걱정 안하고 살아도 된단다. 다 아비 덕이다." 자신의 무능을 기묘하게 각색한 아버지에 대해 아들은 할말이 없다는 황당한 표정으로 응답한다. 80년대 한 일간지에 실렸던 4컷짜리 시사만화 내용이다. 당시 없이살던 서민들이 만화 내용을 주고받으며 한편으론 자조하고, 한편으로는 위안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만화에서 공감가는 부분은 부(富)도 가난못지않게 걱정을 부른다는 점이다. 대체로 창고가 차고 넘칠수록 우려의 수위도 비례한다. 그래서 현명한 부자들은 재산을 이웃에 나눠주며 걱정을 줄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문에 등장했던 80년대 거지도 30년이 지났으니 이젠 인생 말년이 됐을 것이다. 그의 넉살이 아직까지 건재하다면 요즘에는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집 한채 물려주지 못하니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화목하게 지낼 것이다. 다 아비 덕인줄 알아라." 창피한 얘기지만 실제로 내가 엊그제 아이들에게 '진반농반'으로 했던 얘기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들인 삼성가(家) 남매들의 유산다툼과 송사를 실례로 들어가며 지론을 폈지만 아이들은 연민에 찬 눈길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형 이맹희씨, 누나 이숙희씨 등 남매 3명이 얽힌 소송규모가 당초 1조원에서 3조원대로 늘어날 전망이란다. 소송 가액이 늘어나면서 소송을 제기한 2명이 납부한 인지대도 당초 28억여원에서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소송서류에 붙일 인지대만 해도 서민들은 꿈도꾸지 못할 천문학적 액수이다. 삼성물산 직원이 이맹희씨의 아들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미행하다 적발된 사건까지 겹치면서 서민들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도 유산 지분을 놓고 '골육상잔'(骨肉相殘)을 벌이는 재벌가 남매들에 혀를 차고 있다.

그제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이자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동생인 박근영씨가 이번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공천을 받아 보은옥천영동 선거구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선진당이 19일 박씨를 낙천시킴으로써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자매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구설에 오르는 계기가 됐다.

두 사람의 갈등은 고(故)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육영재단의 경영권 다툼에서 시작됐다. 물려받은 유산이 발단이 된 것이다. 육영재단을 운영해 온 박 위원장은 지난 1990년 측근인 재단고문이 비리·전횡의혹에 휘말린 것을 문제삼은 근영씨에 의해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2005년에는 감사거부 등의 이유로 교육청으로부터 이사장 자격을 박탈당한 근영씨가 배후에 박 위원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으로 이어졌고, 2007년 '해임이 정당하다'는 최종판결이 나오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올랐다. 지난달에는 근영씨의 남편이 박 위원장 비방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최근 수년간 자매간에 벌어진 난타전을 짚다보면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출마를 결심했다"는 근영씨의 '우국충정론'에 공감하기가 어려워진다. 육 여사의 고향인 옥천군 유권자들이 근영씨의 출마선언에 비판 일색이었고, 선진당이 낙천을 결정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않다.

박근혜 위원장과 이건희 회장은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양 축인 정치와 경제에서 각각 정점에 올라선 인물들이다. 박 위원장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고, 삼성을 굴지의 세계적 브랜드로 키운 이 회장은 이미 경제 대통령으로 통한다. 그러나 '없이 살더라도 형제간 우애가 좋아야 한다'는 서민들의 소박한 정서와 불통하는 모습에서는 국가경영을 주도할 포용의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어려울 때 훈훈한 장면을 만들어 국민들을 위안하는 것도 지도자들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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