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성지' 세계순례지로 거듭난다
'고난의 성지' 세계순례지로 거듭난다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2.01.3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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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 100억원 투입 진천 배티성지 명소화
충북도가 오는 2016년까지 100억원을 투자해 진천 배티성지(梨峙聖地)를 세계순례성지 명소화로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 배티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지난 28일 찾은 배티성지엔 추운 날씨에도 타 도에서 온 수녀들과 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연 20여만 명이 찾을 만큼 종교적 가치를 떠나 문화적 가치가 있는 배티성지는 지난해 3월 도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됐다.

배티성지는 대한민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인 조선교구신학교 터가 있었고 천주교 박해기에 교우촌(敎友村)이 15곳 형성된 것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다.

천주교 청주교구는 배티성지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충북도와 함께 성지화 사업을 통해 순교박해박물관, 최양업 신부 기념관 건립, 배티 순례길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있는 깊은 산골이다.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였다.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고개라는 것에서 지명이 생겼다는 배티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형성된 교우촌으로 1853년 성 다블뤼 주교가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를 설립한 곳이자 최양업 신부가 한글로 된 '천주가사'를 지은 곳이다.

최초의 조선 교구 신학교 마을이 있었던 이곳에서 최양업 신부는 1853년부터 약 3년간 배티 교우촌을 본당(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했다.

배티성지에 도착하기 전 도로변 우측에는 '삼박골 비밀통로'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 길은 박해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통로였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 남아 있다.

◇ 한달에 3일 자고 1년 7000리 사목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 성인(프란치스코)과 이성례 순교자(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국을 돌며 사목을 하다 만 40세에 선종하는 그날까지 최 신부는 한 달에 3일 자고 1년에 7000리를 걸어다니며 12년 동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땀의 순교자다.

최 신부는 1853년 여름 배티 조선교구 신학교의 지도를 맡은 이후 약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본당 중심지로 삼았다.

장마로 길이 끊기는 7~8월에는 배티 사제관에서 저술에 몰두했다. 글을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도 지었다.

1997년 봉헌된 최 신부의 기념상을 시작으로 산길 왼쪽에는 야외 제대를 거쳐 성모 마리아상까지 십자가의 길 14처가 세워져 있다.

각 처는 모두 맷돌 위에 새겨져 있어 박해 기간 신자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측에는 103위 순교 성인계단이 있다.

성모상을 지나 좌측으로 2를 더 가면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과 무명 순교자 묘역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사제관은 1850년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교구 소신학교 설립을 명을 받은 다블뤼 성인 주교가 배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 교사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다.

이곳에서 배티 고갯길을 가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 순교한 14기의 순교자 묘인 '무명의 숨은 꽃'이 있다.

◇ 한국의 카타콤브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에서 6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그러나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에 순교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34명.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없는 묘소로 산재해 있다.

한국의 카타콤브(Catacomb·초기 그리스도인의 은신처 및 활동무대였던 지하 공동묘지)로 불리는 이곳엔 한국의 천주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배티 골짜기와 산너머에는 비밀 교우촌이 형성됐다.

1837년 모방나 성인 신부(나 베드로)는 샤스탕 성인 신부(정야고보)와 배티 교우촌에서 3~4일을 머물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배티교우촌은 충청도 최초 공소로 설정됐다.

박해 시기 배티 인근에는 배티, 삼박골, 은골, 정삼이골, 굴티 등 교우촌 15곳이 형성됐다. 윤의병 신부(바오로)의 박해소설 '은화(숨은 꽃)'의 주요 무대가 됐다.

배티와 그 인근에는 유·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28기가 산재해 있다. 박해깅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 수는 모두 34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 시복 시성 재판이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은 총 8명이다.

배티성지에서는 최양업 신부와 모친 이성례(마리아)를 비롯해 오반지(바오로(진천 지장골), 김원중(스테파노·백곡 발래기), 장 토마스·송 베네딕토·송 베드로·이 안나(배티),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백골 절골) 등 10명의 시복 시성을 위한 현양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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