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견(蜀犬)이 짓는 이유
촉견(蜀犬)이 짓는 이유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2.01.10 0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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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연초를 맞아 '사자성어'가 홍수를 이룬다.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 정치인과 고위 관료, 기관장, 재벌 총수들은 물론이고 자치단체장들에 이르기까지 근사한 사자성어를 찾아 신년을 맞는 각오와 소회를 밝혔다.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에 신중하고 치밀한 마음으로 일을 잘 성사시킨다는 뜻의 '임사이구(臨事而懼)'를 선택했다. 대학 교수들이 꼽은 사자성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올해 양대 선거가 정의를 담아내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듯 하다. 삼성그룹은 '편안함 속에서도 늘 위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의 '안불망위(安不忘危)를 택했다. 평소에 듣지 못한 낯선 글들이라 가방끈 짧은 서민들은 해석에 바쁘다. 그리고는 혀끝에서 끝나고 마는 사자성어 잔치에 코웃음을 친다.

신년을 테마로 한 것은 아니지만 생뚱맞게 등장한 또 하나의 사자성어가 눈길을 끌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연루 의혹을 받았던 BBK사건 당시 주임검사를 맡아 수사를 지휘했던 최재경 대검 중앙수사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 '촉견폐월(蜀犬吠月)'이다. 촉나라 개들은 달만 뜨면 짓어댄다는 뜻이다. 옛 촉나라 땅인 사천(四川) 지방은 흐린 날이 많아 달을 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개들은 달만 뜨면 그게 달인지도 모르고 물정 없이 짓어대기만 한다는 것이다. 식견이 떨어지는 잡인들이 현인의 언행을 의심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최 부장은 대선 당시 BBK사건에 대통령이 관여했다고 주장한 정봉주 전 의원이 유죄 확정으로 수감된 후 재수사 논란이 재연되자 이 사자성어를 들어 일축한 것이다. '10명의 검사가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향해 나아가' 도달했다는 수사 결과에 툭하면 태클이 들어오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현자에, 의심하는 사람들은 잡견에 비유한 것은 식견있는 현인의 태도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일반인들은 듣도보도 못한 절묘한 사자성어까지 통달한 고매한 식견만큼은 인정하겠지만 말이다.

그는 "한국사회 시스템이 그리 만만치 않다"고도 했다. 우리 사회 시스템이 검사들이 수사를 주물럭거리고 진실까지 덮어 버리는 것을 용납할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시스템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권력의 전횡 앞에서 허술한 시스템마저 붕괴돼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 황태자로 군림했다는 정용학씨는 우리 공적 시스템의 허구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방통위 정책보좌관 시절 EBS 이사에 선임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수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으며, 지난해 돌연 사표를 내고 해외로 줄행랑을 놓은 상태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2008년 취임 후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정책보좌역'직을 신설하고 정씨를 발탁했다. 그는 '실세중 실세'로 행세하며 방송·통신업계의 각종 사안과 이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숱한 의혹에 휩싸인 그가 귀국해 수사를 받으면 '쓰나미'가 닥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공공기관의 장이 없는 자리도 만들어 측근을 끌어들이고, 보좌관에 불과한 이 인물은 조직 전반을 종횡하며 전횡과 비리를 일삼다가 꼬리가 밟힐 듯 하니까 해외로 날라버리는 나라의 시스템을 만만찮다고 보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의 시스템은 소위 '일진'으로 통하는 철부지 권력들에 장악당한 지 오래다. 죽음을 부르는 잔혹한 폭력과 고문, 갈취가 교실에서 일상이 돼왔지만 학교를 관장하는 내외부 시스템은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스템이 상황을 방조하고 야합하고 비극을 키움으로써 공범을 자임해온 꼴이 됐다. 시스템이 먹통이 된 시대에 국민이 기댈 것은 추상같은 사법권밖에 없다. 그러나 검찰 간부, 그것도 대검 중수부장의 입에서 우리네 시스템이 믿을 만 하다는 평가가 나오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검찰의 인식이 이렇다면 촉나라의 개들은 늘어나고 우짓는 소리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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