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에 대하여
사라짐에 대하여
  • 정규호 기자
  • 승인 2012.01.0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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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부국장(보은·옥천)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량한 사람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총선과 대선이 잇따라 치러지는 격동의 해 2012년 벽두에서 문득 떠오르는 이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며칠 전 영결식을 치른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은 '분노하라. 투표하라'는 말을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겼는 데 역설적이게도 선량한 사람의 행동을 촉구하는 위의 말을 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보수의 원조로 불리는 에드먼트 버크가 했다.

그는 또 '나쁜 정부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수상한 산들바람이 불어 올 때면 다가오는 독재의 냄새를 알아차려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을 독재의 시대로 규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독재라니 때가 어느 때인 데"라며 종 주먹을 쥐며 을러대는 사람이 오히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 부재의 시대는 독단으로 기억되고, 그 독단은 결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연상시키는 법이니 우려할 일 아닌가.

김근태 선생은 모진 세월을 살다 저 세상으로 갔다.

세상에! 고문이 예술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는 목사가 되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 이 땅의 선량한 사람들은 하나 둘 자꾸만 사라지고 있으니 남아있는 설움은 땅을 치고 통곡해도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허기야 MB도 어차피 임기가 끝나면 사라질 것이고 상당수의 정치인도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모습을 감출 것이니 모든 사라짐이 허무하기만 한 일은 아닐 터.

다만 '분노하라. 투표하라'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의 마지막 사자후를 제발 잊지 않고 사는 선량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그리고 도덕성. 국민을 대표하고 나라의 표상이 되는 정치 지도자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한 도덕성을 선출의 최우선이 되어야 함을 우리는 참으로 비싼 값을 치르며 익혔다는 점 역시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전문>

언젠가는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고, 어느 때가 되면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시인의 말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나,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분노해야 하며 더 착해질 필요가 있고 행동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어린 소년을 죽음으로 내몬 학교 폭력의 비열한 현실에 대한 책임을 단지 그들 소년의 시대에만 물을 수 있을 만큼 어른들은 자신이 있는 것인가.

그 애절한 소년의 사라짐이 혹여 지나친 경쟁의 사회, 일등만 인정하는 더러운 세상과 지독한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반성하는 어른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한 때의 울부짖음 만큼 오래 오래 잊지않고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생겨나지 않도록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올바르게 커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그들 소년시대를 외롭지 않게 할일에 대한 고민은 또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하기야 고문조차 예술이라고 떠벌이는 어른이 버젓이 살고 있고, 그 예술 운운에 분노하는 예술인을 아직 찾아 볼 수 없으며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은총이라는 '용서'를 내어 줄 아량은 모든 것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인지도 의문스러운데.

이 세상 모든 사라짐이 차라리 비통하다.

나는 지금 세상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한다. 사라지는 것들이 있어야 새로운 만남도 있는 법. 내 뒷모습은 그동안 아름다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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