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눈
겨울눈
  • 이수안
  • 승인 2012.01.03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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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서 온 편지
이수안

시련의 계절이다. 우우우웅-, 바람이 겨울 산의 짐승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왔다 멀어지고 또 왔다가 멀어져간다. 된바람 앞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는 포도나무의 표정이 의연하다. 나는 섣달 그믐밤에 초병을 서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심정이 된다.

앙상한 가지 마디마다 겨울눈이 볼록하다. 이 작은 하나의 눈에는 포도나무의 다음 삶이 들어 있다. 포도잎과 포도꽃 그리고 포도송이를 품고 있는 산실인 것이다.

이 귀한 눈도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면 헛일이다. 그래서 나무는 스스로 외투를 만들어 겹겹이 눈을 감싼다. 따스한 솜털로 여린 눈을 보호하고, <아린>이라고 하는 매끈한 비늘잎으로 단단히 여민다. 물기에 젖어 얼거나 바람에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 외투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꽃을 피울 때도, 열매를 키우고 익힐 때도, 나무는 이듬해의 삶을 함께 준비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지난여름 이상기후로 우기가 길었기 때문이다. 햇빛이 부족해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잘하지 못했다. 외투가 부실할 수밖에 없다.

겨울나기가 걱정인 농사꾼에게 한미 FTA 무역 협정이라는 더 큰 추위가 다가오고 있다. 한편에서는 경제를 살릴 기회라 목소리 높이는데 나는 왜 자꾸 의심이 가는 걸까. 문구멍으로 팔뚝을 쑥 들이밀며 "엄마 왔다, 문 열어라." 하는 전래 동화 속의 호랑이로만 보인다. 얼핏 보면 자상한 엄마의 팔이지만 실은 털을 깎고 밀가루를 묻힌 호랑이의 무서운 팔이 아니던가.

"경제를 살리는 촉매가 될 것이다."

"아니다, 망칠 것이다."

차근차근 준비해도 버거울 상대 앞에서 우리 사회는 갑론을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농사꾼의 입장이 참으로 딱하다. 든든한 외투 한 벌 없이 맹추위 앞에 노출된 겨울눈의 모습이다.

돌아보면 농촌이 걸어온 길은 만만치 않았다.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WTO라는 산을 만났을 때 그 이름이 얼마나 낯설었던가. 그때도 우리 사회는 잘했네, 못 했네, 말이 많았다. 그쪽 이치에 어두운 농사꾼은 그저 하던 대로 할 뿐이었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거나 과실나무를 심었다. 싹이 돋으면 어버이의 마음으로 정성껏 가꾸었다.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는 참담하지 않았던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문전옥답은 도시인들에게 팔려나갔고 빈 축사도 늘었다. 터전을 잃은 농부는 무작정 도시로 갔다.

지금이라고 그때보다 나아진 것은 없다. 구제역 사태와 사료값 폭등으로 많은 축산농가가 경영을 포기했다. 수확을 못 한 배추밭은 흔히 볼 수 있다. 온 나라가 힘들다 보니 이 정도 어려움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곤두박질치는 것도 날아오르는 것도 농민 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이 일을 접는 이는 그때처럼 많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이 길을 계속 간다. 깨지면 동여매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살아남는 이 농사꾼들로 우리의 겨울눈이 단단해질 수 있을까.

흑룡의 새해 아침. 도시로 떠난 이웃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남아 있는 우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새해를 맞았으면 좋으련만….

◈ 필진소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장 역임, 현 편집장, 음성향기로운포도원대표, 한국포도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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