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12월이면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1.12.0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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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해마다 12월이면 새 다이어리를 고른다. 잉크냄새 배인 매끈한 첫 페이지를 열고 정성껏 내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연간계획표에 가까운 이들의 생일이나 기념일들을 정리한다. 음력과 양력을 번갈아 찾아가며 작은 글씨로 한 사람 한 사람 메모하다 보면 함께한 기억들이 따스하다. 그 인연들 덕에 또 한 해 마무리하는구나 고마움이 솟는다.

뭉툭한 모서리, 때 묻은 페이지를 넘기며 기억해야 할 것들을 옮기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스러진다. 스케줄 표엔 한 해 흐름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다. 어떤 달은 보라색으로 차분하게 또박또박 메모해 깔끔하게 정돈되었는가 하면 어떤 달은 푸른색으로 온통 휘갈겨져 있다. 어떤 달은 검고 푸르고 붉은 글자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각기 다른 빛깔의 시간들이 마음의 흐름을 보여준다.

올해 다이어리엔 복잡하고 빼곡했던 삼월을 경계로 비어 있는 날들이 많다. 지키지 못해 ×표 한 약속들이 줄을 선 날도 여럿 있다. 아프고 외롭기도 했지만 빈칸 안엔 독서회 친구들과 인문학 공부하며 보낸 시간이 녹아 있다. 조금 적적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내면의 나와 대면한 흔적이니 한편으론 바람 없는 날의 수면처럼 평온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남편이나 지인들이 주는 홍보용 다이어리 중 쓰기 편한 것으로 하나 고르곤 했는데 올해엔 느낌이 남다르다. 뭔가 특별한 것을 고르고 싶다.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문구사 다이어리 코너를 둘러보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다. 하나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느 아침방송에서 패널들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나이를 지하철 몇 호 선 몇 번 출구로 얘기하는 것을 보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그리 표현하자니 이달이 지나면 난 선로도 출구도 바뀌는 셈이다. 무언가 매듭을 지어야 한다.

낙엽이 아름답던 거리는 이제 싸늘하니 냉기가 돈다. 며칠 비 내린 뒤 한층 말간 하늘 속으로 나무 우듬지마다 떨켜들이 눈물처럼 아름답다. 터질 듯 탱글탱글하기도 하고 앳된 소녀가슴처럼 밋밋하기도 한 흔적들이 빈 가지 마디마디 리듬처럼 경쾌하다. 아마도 아픈 이별 점마다 싱싱한 생성의 약속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때가 되면 스스로 안을 다독이고 잎 꼭지를 밀어내 새 삶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지혜가 의미 깊게 다가오는 12월. 나는 무엇을 떨쳐내고 무엇을 갈무리해야 할까. 미련이 많아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하는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마치 털켜를 만들지 못해 잎을 보내지 못한 참나무 같다. 겨우내 마른 잎 서걱거리며 새 잎 피기를 기다리는 참나무처럼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도 상처를 추스르지도 못한 채 시간을 맞고 있다.

이제는 펴는 힘이 필요한 12월이다. 욕심을 천천히 풀어야 할 시간, 비우고 다독여 매듭짓고 새로운 계획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속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감사한다. 온몸으로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자연에 깃들어 살 수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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