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1>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51>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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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금발 기생… 영욕의 세월 겹겹이
   
위구르군 사령부서 온 장군 눈에 들어 코초로 따라 나서게 되는 라리슈카

라리슈카의 여행은 대부분 그녀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때 화려한 축제가 열리는 음력 정월 초하루 축제를 즐기러 거리로 나갔다. 악사와 무용수와 가수를 구경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린 곡예사들이 낙타 사이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퇴역병사들은 차력사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승려들은 창자를 들어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을 보여주었다. 꼭두각시 인형극도 있었고 재담꾼과 마술사. 줄타기 곡예사. 재주부리는 난쟁이. 저글링 곡예사. 몸을 자유자재로 뒤틀고 구부리는 곡예사. 불을 먹는 재주꾼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주요 행사는 힘센 종마와 황소와 수컷 낙타를 골라 서로 싸움을 붙이는 축제가 성벽 밖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궁정에 모인 족장과 지방 귀족들 앞에서 공연하는 라리슈카는 동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위구르군 사령부에서 온 장군의 눈에 들어 코초로 따라나서게 되었다. 라리슈카는 직업 악사로 인정되어 다양한 축제와 개인 행사에 불려나가 공연하는 대규모 연예단에 소속되었고. 장군에게 잠자리를 같이하는 봉사의 대가로 꽤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코추에 도착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그녀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장군의 부대가 동쪽에 원군으로 파견된 것이다. 위그르-아자족 연합군과 중국 귀의군 절도사 창이차오군과의 전투에서 후원자였던 장군이 전사했지만 그녀는 오래지 않아 아자족 족장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자 생계를 꾸려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몇 달 뒤 중국군이 남쪽으로 철수하자 라리슈카는 아자족과 함께 코코노르를 향해 떠났는데. 둔황 근처에서 병사들과 민병대로 이루어진 무장대의 기습을 받았다. 혼란 속에서 아자족과 헤어진 뒤 라리슈카는 중국인들과 함께 둔황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둔황에서 라리슈카의 음악은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곧 중국 장군급 지휘관들 중에서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내어 부족함이 없이 몸종 하나를 두고 호강하며 살았다. 또한 생리통이 시달리다 춧다라는 카슈미르 출신 승려를 만나 치료도 받을 수 있었다. 둔황 교외 석굴사원에 벽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은 어느 화가가 그녀를 모델로 삼았다는 말도 들었다. 석굴사원에는 악단과 무용수를 묘사한 벽화가 많이 있었다.

867년 둔황 동쪽의 랑저우에서 마침내 티베트 군대를 몰아낸 창이차오 장군은 조카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고 고향으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라라슈카를 비롯한 수백 명의 수행원을 데려갔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라리슈카의 후원자는 더 이상 그녀의 봉사가 필요 없다고 통보했다. 이런 여자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라리슈카의 후원자는 그녀를 수양어미한테 기생으로 팔아넘겼다. 그는 라리슈카가 전쟁포로임을 입증하는 서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생으로 팔아넘겨도 문제가 생길 염려는 전혀 없었다. 라리슈카는 아직 젊은데다 비파 연주 솜씨가 뛰어나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인생은 또 다시 바뀌었다.

장안은 면적이 약 80만 평방킬로미터. 인구가 거의 200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였지만 라리슈카는 몇 년 동안 황성 남동쪽에 동시(東市)와 인접해 있는 유곽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기루는 어떤 봉사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소속 기생들의 소양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최하 등급은 정부가 운영하는 공창이었다. 그곳의 여자들은 전쟁포로나 유죄판결을 받은 자. 범죄자의 아내와 딸이었다. 고객들은 오직 성관계를 위해 그곳을 찾았고 성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최고급 기루에서는 좌중의 여주인 노릇을 하도록 수년 동안 훈련받은 여자들이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녀들은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뿐 아니라 권주가와 온갖 놀이에도 정통했고. 뛰어난 화술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들은 잔치에 동반자로 고용되어 고객과 함께 술을 마셨지만 취하지 않는 요령을 알고 있었다. 정향(丁香)을 씹는 것이 특히 효과적이다.

여자들은 출신 배경이 다양했는데 가난한 부모가 기루에 팔거나 어렸을 때 납치당하여 기생이 된 경우가 많았다. 기루에 들어오면 몇 년 동안 엄격한 훈련을 거쳤다. 최고 명기(名妓)는 시작(詩作)에 능숙하여 성적 기교보다는 문화적 교양으로 보수를 받는다. 요금은 하루 저녁에 동전 1만 6000 문(文)이었다.

라리슈카는 20년 가까이 장안에 머물렀고 처소와 몸종과 애완견도 있었지만. 수양어미 집에서 고용살이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기를 첩으로 삼아 집을 따로 마련해줄 후원자를 찾았지만 그런 남자는 아주 드물었다. 그녀의 비파솜씨 때문에 꾸준히 찾아오는 남자도 몇 명 있었지만 훨씬 많은 남자가 그녀를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기루에서 늙어갔고 해가 갈수록 그녀는 세월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화장에 더욱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했다. 초록빛 눈과 금발만으로는 더 이상 매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리슈카는 얼굴에 분을 발라 눈과 입 주위의 잔주름을 조심스럽게 감추었다.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마에 마시코트(노란색 납)를 바르는 것이 유행했고 기생들도 그것을 본받았다.

라리슈카가 돈벌이 능력이 떨어질수록 집에서 젊은 기생들을 훈련시키고 수양어미와 잡담을 나누며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수양어미의 후계자로 이 기루를 물려받으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리슈카는 제자들을 무척 아꼈는데 특히 한 소녀가 비파 연주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쿠차 음악은 더 이상 중국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실크로드에서 수입된 문물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중국의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중국인들은 자국 전통을 재발견하고 진작시키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쿠차 음악도 인기를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막과 식당들은 서역에서 온 여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880년 가을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북진해 오고 있다는 소문이 시내를 퍼졌다. 장안 주민들은 반란에 대한 소문에 익숙해져 있었다.

수도에 주둔해 있는 오합지졸 병사는 반란군에 완패했고. 반란군은 거침없이 수도로 진군했다. 황제 희종(僖宗)은 처첩들만 거느리고 간밤에 몰래 장안을 빠져나갔다. 장안 주민들은 반란군을 환영했다. 반란군 수령은 승리에 들떠 포고문을 발표했는데. 자신의 거병은 일반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승리에 들뜬 반란군 병사들은 군율을 어기고 시내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사흘 뒤 반란군 수령은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였다.

881년 5월 만사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갔지만 당나라 군대가 재집결하여 서쪽에서 진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반란군들은 철수했다. 장안을 탈환한 당나라 군대도 통제가 안 되기는 반란군과 다를 게 없었다.

철수했던 반란군이 장안을 다시 반격해 당 군을 환영했다는 이유로 반란군 수령은 장안을 깨끗이 씻어내라고 명령을 했는데 장안은 물이 아니라 피로 씻겼다.

반란군들은 유곽에 진입하여 피범벅이 된 얼굴로 수양어미와 나이든 하녀들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병사들은 서로 끌어안고 있는 기생들을 떼어내고 거적을 깐 바닥에 교대로 겁탈했다. 라리슈카는 자기를 강간하고 있는 병사의 손을 물어뜯었다.

성난 병사가 칼을 치켜들어 그녀를 내리쳤다. 의식을 찾았을 때 옆에 어린 기생이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있고 칼로 난자당한 몸과 머리는 잘려있었다. 그녀의 애완견도 죽어있었다.

라리슈카는 한순간도 거기에 머무를 수 없었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면 남의 집 문간에 숨으면서 골목길만 골라 달렸다. 탁 트인 들판에 나와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밤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불타는 도시가 보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로 솟구치는 불길뿐이었다.

그것이 라리슈카가 본 장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국경을 넘은 라리슈카는 상인들과 합류했다. 중국이 전란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실크로드를 따라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몇 달 뒤 무사히 그녀는 쿠차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녀는 가족과 친지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했다.

라리슈카가 쿠차를 떠난 것은 26년 전인 855년 그녀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세기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위그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징후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행정뿐만 아니라 의복과 예술. 종교. 문화에도 위그르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위그르 카간의 지배권은 쿠차 너머까지 뻗쳐 있었다. 전에는 왕실행사나 공식행사 때 언제나 쿠차 악단이 공연했지만 이제는 위그르 군대가 뿔피리와 북과 종으로 귀에 거슬리는 음악을 연주했다.

라리슈카는 중국에서 반란군에게 당했던 봉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장안에서의 그날 밤을 잊지 못했다. 이마의 흉터와는 달리 기억은 세월이 가도 흐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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