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되는 사과
사과를 깎다가구멍에서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내미는 애벌레와 마주쳤다
애벌레는 화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소유한 별을
누가 건드렸냐는 듯 두리번거렸다
칼을 들고 나는 망설였다
사과는 애벌레의 부엌이자 방이요
뜯어먹을 한 세계였던 것이다
(중략)
사과를 한 입 물어뜯으며
입술의 물렁함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장님애벌레로 변신할 필요도 없이
나의 세계가 즙을 흘리며
붕괴되는 소리를 들었다
시집 '아무 것도 아니면 모든 것인 나'(열림원)중에서
<김병기 시인의 감상노트>
사과를 깎을 때에는 안을 잘 들여다 볼 일이다. 그 안에서 따스한 구멍의 집을 짓고 탁란(托卵)하는 벌레의 숨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이 세상에 목숨을 드리운 것들은 셋방살이로 살다가 허물 벗고 지나간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는 일 많다. 바람이 불면 고마운 몸짓으로 절 올리는 풀들은 아름답다. 아늑한 애벌레의 방으로 마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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