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8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8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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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병법가 오자서(五子胥)
오후 3시 반경 오(吳)나라 성인 판문을 방문했다. 입장권에 배 삯이 포함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입구에 있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성 앞 작은 수로를 100여 미터 노 저어 갔다 오는 코스다. 뱃사공이 짧은 노래 가락 한 곡조를 뽑고는 천천히 되돌아오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규격화된 관광 상품 같아 실망스러웠다.

배에서 내려 매표소를 지나 좌측 계단을 따라 오르니 우뚝 솟은 탑과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벽을 뒤덮으며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아래 빈 성터엔 관광객을 상대로 활쏘기 하는 장사꾼과 기념품가게로 변한 오나라 작전회의실이 나타난다. 성 아래로는 수로가 뚫어져 물이 흐르고 성벽 사이사이에 녹 쓴 포대들이 한여름 뙤약볕에 게으른 나신(裸身)을 뉘이고 조용히 잠들어 있다.

아직도 망루엔 오나라 깃발이 뜨거운 바람에 창끝을 세우고 세월을 가르고 있다. 성벽 한 켠엔 수문 쪽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좁은 통로가 수로와 연결되어 있고 성벽위로 늘어선 붉은 등 행렬은 담쟁이 넝쿨 속에서 오나라의 부침(浮沈)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다.

병사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아늑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오상사(伍相祠) 회랑을 지나 두 번째 화원에 들어서면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병법가인 오자서(伍子胥) 장군의 동상이 근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기장산하(氣壯山河)란 글씨 아래 왼손에 칼을 잡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정원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청동으로 된 갑옷을 입은 오자서는 2,500년의 시공을 넘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춘추시대 말기 진나라와 초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무렵, 양자강 하류 지방에 오(吳), 월(越) 두 나라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중국 동남부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오자서의 눈부신 활약은 중국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의 태부였던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와 형 오상은 간교한 신하 무기(無忌)의 모함으로 인해 평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오자서는 급하게 오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고 이에 오나라 광은 오자서를 빈객으로 대우하고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광은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고 와신상담(臥薪嘗膽)과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성어의 장본인인 오왕 합려가 되었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를 중용하고 정치와 군사를 개혁하는 등 그와 함께 국사를 의논하였다.

합려 즉위 9년(기원전 506년)에는 채(蔡), 당(唐) 두 나라를 규합하여 초나라로 쳐들어갔고 5차례의 치열한 접전 끝에 드디어 초나라 수도 영(?)에 입성했다.

그러나 초나라 소왕은 영에서 탈출하여 도주한 후였다. 오자서는 분노와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인고의 세월을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부친과 형의 원수인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시체를 꺼내 3백회의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사무친 원한을 풀었다 한다. 원한은 복수를 불러오고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불러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진데, 비바람이 스치고 간 그의 갑옷과 칼집에서 증오의 무게를 더듬어 본다.

오나라는 오자서의 계책으로 서쪽으로는 패자의 이름을 떨치던 초나라를 깨뜨리고 북쪽으로는 제와 진(晋)나라를 위압했다. 오나라가 초나라의 도읍을 점령하고 기세를 크게 떨치고 있을 무렵 오나라 남쪽에 있던 월나라가 그 기회를 타고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인 구천(句賤)이 바로 월나라 왕이다. 월왕 구천의 기습을 받은 오왕 합려는 활을 맞고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기원전 494년 합려의 아들 오왕 부차는 정병을 출동시켜 월군을 총공격하여 부초산(夫椒山)에서 월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여 수도 회계를 포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월왕 구천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에 진을 쳤으나 오왕의 포위를 뚫을 길 없어 마침내 월왕 구천은 월나라를 오나라 부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되고 아내는 오왕의 첩으로 바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제의하며 화의를 요청하였다.

오왕이 이에 응하려 하자 오자서는 “지금 월나라를 멸망치 않으면 나중에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라고 간곡한 반대진언을 하였으나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과 강화를 맺게 되었다. 오나라의 용서로 월나라에 귀국한 구천은 명신 범려(范?)와 대부종(大夫種)을 기용하여 국력회복과 군사력 증강에 온 힘을 기울였다.

쓰디쓴 쓸개를 곁에 두고 언제나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쓸개를 핧으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은 마침내 오나라 수도를 포위하였고 오왕 부차는 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오나라는 패망하고 월왕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비로서 씻게 되었다.

양자강 하류지역의 패권을 잡은 월왕 구천은 북으로 진출하여 제, 진 등 여러 나라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하였다. 동방제국은 구천을 패왕으로 받들어 오나라를 대신하여 월나라가 춘추시대의 최후의 패자가 되었다.

천추에 길이 남는 고사 성어를 남긴 역사의 흔적들이 화석(化石)이 되어 말없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정적에 의해 무참히 암살되는 풍운아 오자서의 비운의 종말도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300대의 채찍을 가하는 복수의 칼끝에서 이미 그 싹을 키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회랑을 지나면 광갑삼오(廣甲三吳)란 현판이 걸린 3층으로 된 커다란 목조건물이 나타나는데 이곳을 지나면 1004년에 지은 53m 높이의 7층 8각형의 목조로 된 서광탑(瑞光塔)이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각층마다 내부를 개조하여 의자나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여 놓았고 송 대의 옛 탑들 모형이나 그림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성벽 안으로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 들여 연못을 만들고 주변에 기이한 돌들을 배치하였다. 과거의 병영이었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답고 우아한 정원처럼 느껴지는 건 쑤저우 사람들이 옛 부터 정원을 꾸미는 데 탁월한 재능과 안목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일 것이다. ./함영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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