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5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35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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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기우는 것도 모르게 皇帝의 눈을 가린 쾌락이여
음악과 함께 서역의 무용도 왕성하게 행해졌다. 이란풍의 무용으로 호선무(胡旋舞), 호등무(胡騰舞), 자지무(枝舞) 등이 유행했으며 유명한 악사들은 대개 강, 안, 조, 미 등 서역국의 출신들이었다.

페르시아에서 전래한 마상격구(馬上擊球)인 파라구는 서쪽으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럽으로 전해지고 동쪽으로는 투르케니스탄에서 중국, 티베트, 인도, 고려, 일본으로 전해졌다.

당나라에서는 태종시대에 전해져 역대 모든 황제는 파라구를 즐겼다. 특히 현종은 젊은 시절 금성공주를 맞으러 온 토번(吐藩)의 사절들과 파라구 경기를 하여 멋지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파라구는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오락으로서 인기가 대단하였으며, 장기의 일종인 대식의 쌍육도 유행하였다.

현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양귀비의 일가는 관직에 발탁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승승장구하였다. 현종의 전성기에는 100명의 황실 직녀(織女)들이 양귀비만을 위해 비단을 짰고 황궁에는 무려 3만 명의 악사와 무용수를 두고 있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가는 개원(開元)의 치세를 누렸던 현종도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국정을 게을리 하는 바람에 나라를 기울게 하였다.

지금 그들이 거닐었던 연못가에는 붕어떼들이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다.

부귀영화와 공명도 한 순간, 세월 앞에서는 연못가에 떠 있는 버들잎 한 닢 같은게 아니던가. 역사의 상흔들이 한줄기 바람처럼 스쳐가고 있다.

구룡호를 지나 비문이 늘어선 정원의 우측을 돌아서면 넓은 광장과 잘 조경된 녹원(綠園)이 나타난다.

1946년 중국근대사의 가장 큰 전환점인 시안사변이 일어난 유적지인 오간청(五間聽)이 있다. 공산당을 토벌하고자 시안에 주둔하고 있던 장학량의 전승을 독려하기 위해 남경에서 시안으로 와 이 건물에 묵고 있던 장개석을 장학량이 감금하고 국공내전의 종식을 요구했던 유명한 역사의 현장이다.

장개석(蔣介石)은 자신의 보호자로 믿었던 장학량(張學良)에게 연금을 당해 괴멸위기에 처한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기사회생한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장소가 바로 오간청이다. 당시 장학량에게 체포당하면서 생긴 총탄의 흔적과 구멍 뚫린 유리창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약 시안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공산당을 괴멸시키고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하였다면 20세기 현대사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어탕유지(御湯遺址) 박물관에는 양귀비의 해당탕(海棠湯)과 현종의 구룡탕을 복원한 연화탕(蓮花湯)이 있다.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 18년이란 안내표식이 붙은 성진탕(星辰湯)등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온천 휴양지의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양귀비가 온천물을 담아 놓고 목욕했다는 대리석 욕조와 연화탕에는 하얀 옥석으로 물고기와 용, 오리, 연꽃 등 다양한 문양으로 18개의 욕실을 장식해 놓아 그 당시 화려했던 생활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도 목욕문화와 더불어 발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퇴폐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안록산은 당의 서역경락(西域經略)으로 당나라에 와서 군대에 봉직하는 서역출신의 강국(康國)인이었으나 안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성을 ‘안’으로 바꾸었다.

안록산은 소그드인과 투르크족의 혼혈인 장수로 751년 거란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고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을 뿐만 아니라 양귀비는 안록산을 양자로 삼기까지 했다.

안록산에 대한 양귀비의 애정이 모성애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추문이 장안에 퍼졌다. 양귀비와 안록산은 관능적인 소그디아나의 회오리 춤인 호선무(胡旋舞)를 배우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장(漢將) 대신 서역출신인 번장(蕃將) 32명을 절도사로 임명함으로써 군사적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수도 장안에서는 안록산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재상에 오른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이 안록산이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중상하자 이에 현종도 안록산을 의심하여 수도로 소환했다.

그러나 안록산은 이를 거부하고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755년 12월 오늘날 베이징인 범양(范陽)에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불과 한달 만에 반란군은 장안에서 동쪽으로 300km 떨어진 중국 제2의 수도인 낙양을 점령했다.

황제는 거수한에게 낙양 탈환을 명했다. 756년 거수한의 군사는 반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했고, 거수한은 안록산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동관을 돌파한 안록산 군대는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장안이 점령되자 현종은 몇 안되는 호위군을 이끌고 도망하였다. 인마가 마외파에 이르러 군사들은 양국충을 교살했다.

양귀비 또한 성난 병사들의 항의에 못 이겨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양귀비에게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세기적인 로맨스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현종의 모습을 가만히 떠 올려본다. 뜨거운 햇살아래 한 쌍의 새가 버드나무에서 정답게 재잘대고 있다. 나비가 꽃을 찾아 정원을 열심히 날라 다닌다. 무엇이 그토록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450년간을 누린 하 왕조 최후의 군주 이계, 즉 걸(桀)왕은 유시씨의 소국을 공격하자 대항할 힘이 없는 유시씨는 많은 진상품을 바치고 말희(妹喜)라는 여인을 걸에게 바쳤다 한다.

용감한 걸은 말희에게 빠져 국가의 재산을 탕진하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자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유명한 고사성어를 탄생시키며 은나라의 탕에게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은나라의 주왕(紂王)도 처음에는 현신의 보필을 받아 선정을 베풀었으나 즉위 9년 유소씨(有蘇氏)를 정벌했을 때 유소씨가 헌납한 미녀 달기(?己)와 사랑을 탐닉하며 폭정을 일삼다 400여 년의 찬란했던 은 왕조를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하게 만든다.

오월동주와 와신상담의 고사를 남겼던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최종 승자도 월왕 구천이 바친 미녀 서시(西施)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오왕 부차의 패망으로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을 볼 때 여인의 아름다움이란 가시를 숨긴 장미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무릇 이 지구상에 존재한 왕조는 멸망하지 않은 왕조가 없다. 흥하면 쇠하고 기운달도 차고 찬 달은 기울 듯이 영원히 존재하는 왕국은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더 아름답고 슬픈 기록들을 담아 후세에 전하는 것은 아닐까.

제국을 치마폭 안에 넣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양귀비도 38세의 짧은 나이에 목을 매 자결하였으니, 인생무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그 다음 해에 현종은 양귀비가 목을 매고 죽은 장소에 남몰래 양귀비의 묘를 꾸몄다 한다.

높이 3m, 지름 5m 정도의 표면이 회색벽돌로 덮여 있는 그녀의 무덤은 그녀가 누렸던 부귀영화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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