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는 장기판의 졸인가 
유권자는 장기판의 졸인가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08.2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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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선거는 유권자의 대변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지배자를 뽑는 제도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일단 뽑아놓으면 유권자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들이 숱하지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다음 선거를 벼르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무상급식을 놓고 벌어진 이번 서울시 주민투표를 지켜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유권자는 장기판의 말 같은 존재들이라고. 물론 장기를 두는 사람들은 여·야 정치인들이다. 장기판의 말은 장기를 두는 사람의 의도와 전략에 따라 공격과 방어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을 유인하는 미끼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장기판의 주인이 아무리 한심한 수를 쓰더라도 말은 항변하지 못하고 복종만 한다.

이번 서울시 주민투표는 크게 봐서 초·중학생 무상급식을 전면적으로 하느냐, 소득 하위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느냐를 유권자에게 묻는 절차였다. 이 문제가 주민투표까지 간 것은 여·야가 각각 시와 시의회를 장악하며 시작된 정쟁 탓이었다. 시청과 의회의 주도권을 여·야에 나눠준 것은 유권자들이다. 권력의 독주를 막고 조화를 이뤄 균형된 행정을 펴 달라는 주문이 담긴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이 같은 희망은 투표용지의 잉크도 마르기 전부터 유린되기 시작했다. 시장은 야당 다수의 의회가 번번히 시정의 발목을 잡는다고, 의회는 시가 의정을 무시한 독선적 행정을 편다며 사사건건 대립하고 충돌했다. 협의나 조율은 뒷전으로 밀리고 상대에 대한 거부와 거부가 반복된 끝에 도착한 종착역이 주민투표였다.

주민투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유권자들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서울시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이 나오고, 시장직까지 걸리며 주민투표는 본말이 전도돼 버렸다. 서울을 한정한 국지전이 여·야가 총출동하고 보수와 진보가 격돌하면서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원치 않는 정쟁의 장으로 끌려나온 유권자들은 선택도 강요받아야 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는 제한적 무상급식이, 민주당 지지자들에겐 전면적 무상급식이 요구됐다. ‘아이들 밥그릇’ 논리에 기울였던 보수들과, 선별급식의 합리성에 귀를 기울이던 진보들은 이념의 대결로 확대돼 버린 판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작 투표에 동원된 유권자들은 자신의 권리가 햇볕도 보지 못하고 어두운 투표함에서 고사당하는 치욕까지 맛봐야 했다.

투표가 끝났지만 유권자들은 여전히 장기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5% 남짓의 투표율에 여당 대표라는 사람은 ‘이겼다’고 우겼고, 야당은 ‘무상복지의 지평이 열렸다’고 환호했다. 서울시민을 떠나 전 국민을 편가르고 갈등의 장으로 몰아넣은 데 대한 반성도, 25.7%가 투표하고 74.3%가 불참한 데 대한 냉철하고 진지한 분석도 없었다. 투표 자체를 보이콧한 중도의 질책과 경고는 애써 외면하고,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갈등을 연장하고 증폭시키는 짓에만 열을 올리는 데 여·야가 다르지 않았다.

서울시장의 사퇴시기를 놓고 여당에서 터져나온 파열음에서도 유권자의 위상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보궐선거를 내년 3월에 치르기 위해 시장이 사퇴를 미뤄야 한다는 정략적 주장은 유권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포기한 행태였다. 10월 보선은 불리하지만 내년 3월 선거는 할 만하다는 어쭙잖은 분석에서는 이들이 유권자들을 어느 수준에 놓고 재단하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벌써부터 여·야는 10월 서울시장 보선을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전초전으로 규정하고 전선을 전국으로 키워가고 있다. 정당의 후보 선발에서부터 치고받는 각축이 벌어질 테고 본선에서는 이번 주민투표보다 더한 복지의 전쟁, 이념의 대충돌이 벌어질 것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혼란과 피로감을 호소하겠지만 지긋지긋한 편가르기 논리들은 연일 난타전을 벌일 것이다.

그래도 유권자가 장기판의 졸보다는 낫다. 모멸을 당하더라도 ‘다음 선거’라는 설욕의 기회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이 기회는 유권자들의 얼음장처럼 냉철한 판단이 전제돼야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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