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49 >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 49 >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0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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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춧다이야기
춧다와 종자도 떠날 때가 되어 이번에는 호탄에서 둔황으로 들어가는 카라반을 따라갔다.

뤄창(若羌)을 지나 이틀 구간을 여행하자 미란 요새가 나타났다.

미란에는 승려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

작은 농촌지역도 있었지만 병사들이 떠난 뒤로는 관개시설을 유지할 수 없었다.

미란을 지난 지 사흘째 되는 날 낙타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무릎을 꿇고 코를 모래 속에 들이 박았다.

낙타 몰이꾼이 여행자들에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 꼼짝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춧다와 종자는 작은 사당에서 불공을 드리느라 잠시 지체하는 바람에 나머지 일행보다 조금 뒤처져 있었다.

그래서 낙타 몰이꾼의 외침소리를 듣지 못했고 열풍이 덮칠 때까지 바람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열풍이 너무나 맹렬하여 숨을 곳도 없는데다 앞으로 달려가 일행과 합류하려 했지만 휘몰아치는 모래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몇 시간 뒤 열풍이 사라졌지만 제 정신을 차리기까지 한참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겁에 질려 허둥댈 때 짐말을 놓쳐버린 것을 깨달았다.

카라반도 사라졌고 사막의 풍경도 달라져 버렸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수십미터 높이의 거대한 모래 언덕은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잃어버린 말 한 마리를 찾아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부터 며칠 동안 해를 보고 무조건 동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연이어 나타나는 모래언덕과 해골들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모래밭에는 햇볕에 하얗게 표백된 뼈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사흘이 지나자 물이 떨어졌고, 말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죽게 내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종자는 착란상태에 빠져 사막의 정령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며 자꾸 엉뚱한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종자가 헛것을 볼 때마다 되풀이해서 붙잡았지만, 마침내 그들은 한 걸음도 더 이상 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춧다는 관세음보살에게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열심히 빌었다.

종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춧다는 남아있는 소지품으로 작은 불단을 만들고 그 위에 불상과 기도문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놓았다.
   

그리고 이틀 동안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계속 염주를 굴리며 기도했다.

다행히 지나가는 카라반에게 발견되어 둔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죽은 종자를 화장하고 얼마 안남은 돈을 사찰 주지에게 주면서 종자와 말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춧다는 종자의 사망경위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호탄으로 가는 승려에게 맡겼다.

몇 달 뒤 춧다는 순례를 마무리하기 위해 둔황을 떠났다.

둔황의 승려들은 10년 전인 845년에 중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법난(法難)에 대해 말해주었다.

수십만 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강제로 환속해야 했고, 수천 개의 불교시설이 폐쇄되었다.

이때 중국 정부가 불교를 박해한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국고가 고갈 되었는데도 사찰들은 면세 특권을 누렸다.

많은 승려들이 환속하자 세입이 크게 늘어났고, 정부는 불상 수천 구를 녹여서 동전을 주조했다.

불교 탄압은 바뀐 대내정책의 일환이었다.

100년 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후 중국은 밖에서 안으로 관심을 돌려 내정에 신경을 썼다.

다행히 법난을 일으킨 무종(武宗)이 이듬해 죽고 즉위한 선종(宣宗)은 불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춧다가 순례를 계속하고픈 열정을 되살린 것은 둔황 교외의 석굴사원에서 우타이(五臺) 산이 그려진 벽화를 보았을 때였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동안 춧다는 언제나 카라반 일행과 함께 있도록 조심했다.

대도시 장안에 도착하자 춧다는 오대산 방문 허가가 나올 때까지 머물다가 순례자 일행과 합류했다.

일행은 북동문을 통해 장안을 떠났다.

중국 여행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허약한 정부가 갈수록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농촌은 침체된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

춧다와 동료 순례자들은 북쪽으로 가는 동안 마땅한 숙소를 찾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심지어 사찰에서도 상인과 군인들이 방을 다 차지했다면서 그들을 문전박대했다.

어떤 절에는 그들이 다가가자 승려들이 모두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

또 어떤 절에서는 빗자루를 휘두르며 그들을 쫓아냈다.

그들은 평신도의 호의에 의지해야 할 때가 많았고, 그마저도 항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스무 집을 돌아다녔는데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결국 춧다는 억지로 집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집주인은 끝내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오대산(우타이산)과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타이위안에 도착했을 때 춧다는 무종 황제 치하에서 박해받은 마니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마니교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조국 땅에서 쫓겨난 위그르인들은 중국 국경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2년 뒤 남은 위그르 군대가 타이위안 북동쪽에 있는 국경에서 중국군과 싸우다 전멸 당했다.

그 후 당나라 조정은 마니교 사제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남녀 불문하고 불교승려가 입는 짙은 색 승복을 강제로 입혔고 굴욕의 표시로 머리를 박박 밀었다.

마니교 사제들은 전통적으로 하얀 옷을 입었고 머리도 삭발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70명 이상의 여승이 살해되고 나머지 남녀 사제들은 추방되었으며, 마니교 경전은 길거리에서 불태워졌다고 한다.

불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였다.

무종이 죽자 불교 부흥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불교는 과거의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대산(우타이 산)은 해발 3000m 안팎의 다섯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늦어도 서기 3세기에는 이 산꼭대기와 주변 저지대에 사원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5세기에는 이미 200개가 넘는 종교시설이 들어차게 되었다.

사원들은 서기 7∼8세기에 정부의 상당한 지원과 수만 명의 참배자들로 번영을 누렸다.

인도와 한국, 일본에서도 승려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일부는 여러 해 머물면서 공부를 하였고 일부는 다녀갔다는 증거로 바위에 이름을 새겨 남기기도 하였다.

824년 티베트 황제는 중국 황제에게 오대산 평면도를 요청하여 받아냈고, 이제는 티베트 승려들이 오대산을 찾기 시작했다.

티베트 왕가는 지난 세기에 불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티베트에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은 한참 뒤였다.

춧다는 오대산에서 여러 달 머물면서 모든 사찰과 사당을 방문했다.

유명한 육각형의 회전식 경장(經藏)을 비롯한 유적지도 모두 돌아 다녔다.

거의 날마다 법회에 참석했고, 시주가 특별한 일을 기념하거나 승려들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도 자주 초대되었다.

춧다가 오대산을 떠난 것은 한 겨울이었다.

순례를 끝낸 춧다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안에서 서류를 신청했다.

둔황에 도착해 머무르는 동안 카스미르를 지배하던 카르코타 왕조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춧다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서 새 왕의 평판을 들어본 뒤에 여행을 계속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후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때는 870년 그는 둔황에서 20km쯤 떨어진 벼랑 옆 사찰에 살면서 15년 동안 둔황 시내에서 의술을 베풀고 있었다.

춧다는 사찰 바깥에 벌여 놓은 좌판 앞에 앉아서 새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의술은 둔황에서 인기가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춧다도 실크로드에 매혹되어 떠나지 못하고 지금껏 머물러 있었다.

그날은 시내 중심가의 또 다른 사찰에서 좌판을 벌였다.

여기서 그들은 두루마리 서화나 책자, 부적 따위를 팔았다.

이 고장 토박이 승이든 행각승이든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점을 쳤다.

꿈과 변괴를 풀이해 주는 사람, 육효(六爻)의 점괘를 해석하는 사람, 관상쟁이도 있었다.

중국 황제는 개인이 책력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책력의 수수께끼 같은 계시를 해독할 수 있을 만큼 학식이 있거나 그런 일에 능숙한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에 점쟁이한테 복채를 내고 설명을 들었다.

의료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갈색 장삼을 걸친 승려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헝겊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말린 식물과 동물을 쌓아 놓고 파는 약장수도 있었고 침술사, 손금쟁이, 진맥 전문의, 안마사, 외과의사, 소아과 의사, 기도 전문 승려와 도사도 있었다.

이런 치료법이 전혀 효과가 없으면 환자는 책이나 글을 베껴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인 사자생(寫字生)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사자생은 불경을 베껴주고 거기에다 부처한테 기원하는 문구를 덧붙여 주었다.

또는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염불을 암송하기도 하며 승려에게 돈을 주고 예불을 드릴 때 그 발원문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거나 향과 과일을 공양할 수도 있었다.

거리에서 팔리는 약은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둔황에서는 그리스,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티베트, 중국의 전통 의약품이 모두 팔리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중국의 공식 의약품 목록에는 850가지 이상의 약이 기재되어 있었고 처방과 투약에 대한 지식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의술은 약을 투여하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침술과 진맥, 안마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다.

인도에서는 백내장 수술이 발달했으며 그리스와 페르시아 의사들은 뇌수술로 명성을 얻었다.

사체의 사인이 의심스러울 경우 검시하는 요령을 중국 관리들에게 알려주는 안내서까지 있었다.

여기에는 익사체인지 아니면 그 전에 살해된 것인지를 구별하는 방법 따위가 적혀 있었다.

/시인·극동정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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