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노동
아내의 노동
  • 정규호 부국장<보은·옥천>
  • 승인 2011.07.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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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부국장<보은·옥천>

아내가 공장에 나간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가녀린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짚어가는 일을 할 땐 고생한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늙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며 공장을 나가겠다는 말을 할 때 차마 반대하지 못했던 내 서글픔이 지금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아내가 공장에 나가 일을 하는 걸 차라리 외면하며 쓰린 가슴으로 종종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차마 모른 체하는 일은 어쩌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비로소 느낀다.

한때 나는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노랑나비 흰나비 담장 위를 날아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사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거나, ‘순이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남녀모두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여기는 또 다른 고향’<김민기. 공장의 불빛> 같은 소위 운동권 노래를 꽤나 자주 읊조렸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자본가의 착취 등을 어설프게 떠들어 댔던 내 젊은 날의 치기는 그러나, 빨라야 밤 9시는 돼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내의 초라한 몰골을 매일매일 봐야만 하는 요즘의 내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낭만일 수 있겠다.

참 이상하다. 피아노 학원이면 괜찮고, 공장에 다닌다는 것은 불편하기 그지없는 일로 생각하는 내 편견의 뿌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미디어학자 박근서는 이러한 ‘이율배반적 태도’에 대해 사회 권력의 효과가 개인의 내면을 파고 든 결과, 즉 주체구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욕망과 담론의 불일치 혹은 모순은 수용자에게 감정적 반응과 이성적 반성에서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율배반’이란 주체형성의 모순된 결과, 주체의 내적 복수화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런 쉽지 않은 학습 역시 아내가 공장엘 나가고 없는 그 빈자리의 허전함을 책읽기로 외면하겠다는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장이면 어떻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이면 또 어떤가.

다만 그것이 여러 가지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남편으로서의 나, 가장으로서의 나로 인해 생겨난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찢어지는 내 마음속 상처는 아무래도 쉽게 치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50대 이상 여성 고용률이 20대 전체 취업률을 넘어섰다.

통계청은 최근 올 2분기 50대 여성 고용률이 59.3%로 1992년 3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1992년 3분기 이후 최고치라는 것이다. 50대 여성 취업자는 209만 3000명으로 10년 전인 2001년보다 72%나 늘었고, 전체 여성 취업자 중 50대가 차지하는 비중도 처음으로 20%를 넘겼다.

이를 두고 혹자는 모성과 노후의 안정적인 생활을 그 이유로 든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비정규직으로 직업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서비스 직종 등의 허드렛일 또는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아도 되는 막일에 주로 투입되고 있다.

결국 이를 바꿔 말하면 노동경직성이 악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학자금과 생계비 부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내 아내의 쉴 수 없음은 변변치 못한 남편과 능력 없는 가장의 이름으로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거기에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아내만의 몫은 아닌데도 매일매일 손톱 밑의 기름때를 부끄러워하는 내 여자에게 내 긴 한숨은 차라리 또 다른 멍에일 것이다.

거기에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성과 중년의 세대를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조한 20대 청춘의 철없음을 비교하는 사회적 현상을 들이대는 일은 부질없다.

아내는 공장을 다닌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기 싫은 내 알량한 자존심은 길지 않은 여름밤 내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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