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에 좌절감 주는 '사외이사제'
실업자에 좌절감 주는 '사외이사제'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07.1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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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얼마 전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이 올해 1월 영업정지된 삼화저축은행의 사외이사로 과거 3년간 재직했던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었다. 당시 해명에 나선 정 수석의 발언은 또 다른 논란을 불렀다. 그는 "1년에 한두 차례 회사의 자문에 응하며 사외이사 직무를 수행했지만 경영회의에 참석하거나, 로비활동을 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삼화저축은행의 부실에 책임을 질 만한 위치도 역할도 아니었다는 해명이었지만, 한 달에 200여만원(본인 주장) 정도 받은 수당은 거의 '불로소득'이었다는 사실을 실토한 셈이 됐다. 1년에 한두 차례 자문을 해줬다니 한 번에 최소 1200만원의 수당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사외이사는 말 그대로 회사 경영진에 속하지 않는 이사이다. 대주주와 관련없는 외부인사를 이사회에 참여시켜 대주주의 독단과 전횡을 견제하고 감시해 소액 투자자 보호와 합리적 경영을 꾀하는 제도이다. 사외이사제가 활성화되면 합병, 인수뿐 아니라 투자, 인사 등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소액주주까지 포함한 투자자들의 보편적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상장기업들의 이사 45%가 그 기업과 관련이 없는 사외이사들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국내 대기업 사외이사들의 연봉과 역할이 재차 화제가 되고 있다. 한 해 10차례 안팎의 이사회에 참석하면서 과도한 연봉을 챙기고, 대주주의 거수기 역할만 한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다.

사외이사 연봉이 가장 높은 곳은 현대제철로, 평균 9700만원이라고 한다. 지난해 이 회사 사외이사들이 정기·임시 이사회에 참석한 날이 열흘이니 하루 임금이 970만원인 셈이다. 이 회사 사외이사들은 지난해 총 22건의 안건을 모두 반대 없이 가결 처리했다. 현대모비스 사외이사 5명의 지난해 평균 연봉은 9400만원이었다. 지난해 총 11차례 정기·임시 이사회가 열렸으니 1차례 출석에 854만원씩을 받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부분 상장사 사외이사 연봉이 6000만원을 웃돌지만, 안건 심의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10%도 되지 않는다. 지난해 국내 100대 상장사 사외이사 10명 중 9명은 모든 안건에 대해 '원안찬성' 의견만 냈다. 반대, 보류, 기권, 수정의결 등 찬성이 아닌 의견을 한 번 이상 제시한 사외이사는 전체 466명 중 46명(9.8%)에 불과했다. 작년 100대 상장사의 이사회 안건 2685개 중 사외이사의 반대로 부결된 것은 0.15%인 4건에 그쳤다. 임원 특별상여금 지급, 계열사 유상증자 참여, 회사채 발행한도 승인 등 소액 주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안건도 100%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런 현상은 재벌기업으로 갈수록 극심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화학 등의 이사회는 지난해 안건 심의에서 단 한 건의 반대 의견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기업이 고가에 사들인 거수기일수록 성능이 좋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사외이사들이 전문적 식견과 판단 능력이 없거나 대주주로부터의 독립성이 부족해 반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주요 원인은 후자일 공산이 높다. 현행법상 사외이사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추천을 거쳐 주주총회에서 임명된다. 대부분 후보추천위는 기존 사내이사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어 독립성이 떨어진다. 사주나 대주주의 의중이 반영된 인선이 될 공산이 높다.

재계는 요즘 정치권의 소득·법인세 인하방침 철회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감세가 기업경쟁력을 높이고 일자리 창출을 통해 국민 소득수준을 높이는 정책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정된 안건에 손만 들어주는 허수아비 사외이사들을 선임하고 한 번 출석에 수백만원씩을 지급하는 기업들이 경쟁력을 언급하는 모습은 어정쩡해 보인다. 도입 취지가 실종된 사외이사제는 정부통계만으로도 100만명에 육박한다는 실업자들에게 또 하나의 좌절을 안기고 있다. 사회에 건전한 직업관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도 기업의 몫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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