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출국
도피성 출국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07.0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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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도피성 출국'이라는 말이 한국처럼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나라도 없을 것 같다. 주로 검·경의 수사나 청문회 출석 등을 앞둔 대기업 총수들이 의혹을 받는다.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치고 이런 의혹을 받지 않은 인사가 없을 정도다. 물론 당사자들은 출장이나 신병치료, 연수 등을 내세우며 '도피성'이라는 수식어를 부인한다.

일단 해외로 피해 분위기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거나, 해법 모색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선택하는 이 전략은 대체로 성공작으로 귀결된다. 해외 체류기간이 아주 길 때도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99년 분식결산과 횡령, 외환도피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가 임박하자 출국해 5년여 만인 2005년 귀국했다. 재판에서 징역 8년 6개월에 18조원에 달하는 거금을 추징당했으나 이듬해 바로 사면됐으니 장기간 해외 유랑에 대한 보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을 비롯해 정몽구 현대차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도 한두 번씩 출국의 시점 때문에 이런 눈총을 받아야 했다. 지난해는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뇌물수수와 중여세 포탈 등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출국했다가 4개월 만에 귀국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리해고로 극심한 노사갈등을 빚었던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이 국회 출석을 앞두고 해외출장을 구실로 출국해 여전히 회장님들의 '전매특허'임을 입증했다. 그는 지난달 2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한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할 예정이었다. 17일 국회에 출석하겠다고 통보까지 해놓고 20일 돌연 해외 출장에 나섰다고 한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만약 그가 환경노동위에 출석했으면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환노위 의원들은 한진중공업이 작년말 경영난을 들어 정리해고를 포함해 총 400명을 퇴직시켰지만, 바로 다음날 대주주들에게 174억원을 배당하고 이사들 연봉을 1억원씩 올렸다고 주장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조 회장의 장남인 이 회사 상무가 선박 건조를 전혀 수주하지 못해 경영난을 초래했다는 책임론도 제기될 전망이었다. 자칫 족벌경영의 폐단까지 드러날 참이었으니 조 회장이 해외출장으로 대처했다면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이번에는 정치권에서 '도피성 출국'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2일 발트 3국 및 덴마크 공식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한 의원은 KBS 수신료 인상안을 다룬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민주당 대표실에서 진행된 비공개회의 녹취록을 공개해 '도청' 논란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더욱이 민주당으로부터 고소당해 경찰의 출석 요청을 받은 데다 민주당이 공영방송인 KBS 연루설까지 제기하며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이날 출국이 예정돼 있었다 하더라도 사단의 중심에 선 당사자로서는 외유를 포기하고 해명과 수습에 나서는 것이 상식이다.

만약 제1야당의 대표실이 도청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범죄 행위다. 거기에 국회의 '수신료' 논쟁에서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공영방송까지 거론되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만에 하나 KBS가 야당 대표실 비공개회의 녹취록이 여당에 전달되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이는 초대형 스캔들이 된다. 여론은 수신료 인상 논쟁에서 철폐로 급선회할 수도 있다.

국회 환노위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조남호 회장의 출국을 국회를 경시하고 우롱한 '도피성 외유'라고 비난하며 고발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렇게 국회의 자존심과 권위를 중시한다면 이번 한 의원 외유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여론과 정치권을 들끓게 해 놓고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이 출국해 버린 한 의원 역시 국회의 위상을 떨어트렸다는 점에서 조 회장과 다를 게 없다. 여야가 함께 나서 이 시대착오적인 행태의 진실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국회는 조 회장의 출국을 논할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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