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욕심이 만든 화려함 … 상처는 그대로
끝없는 욕심이 만든 화려함 … 상처는 그대로
  •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1.06.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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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⑦ 인민궁전 그리고 통일광장

김일성 주석궁 본 차우세스크 궁전 건축

지상 11층 '인민궁전' 美펜타콘 다음 커

혈세남용 말로 1989년 아내와 총살형

현재 국회의사당·학회장 용도로 사용

궁전 앞 통일로 佛 샹제리제 거리 모방

거리중앙 41개 분수·현대적 건물 위용

혁명광장에서 슬픈 역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착잡한 기분으로 버스에 오른 우리는 루마니아대학이 있는 대학광장, 국립극장, 시립박물관 등을 스쳐지나 조금은 우중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시가지 건물들, 그러나 대리석 또는 석회암으로 일사불란하게 지어져 있었고, 아름다운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고풍스러움과 역사성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 거리 저 거리를 구경하고 오는 우리들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한눈에 건물 전체가 다 들어오기 어려울 정도의 큰 건물이었다. 우리가 목표로 정한 바로 그 인민궁전이라 한다. 원래 인민궁전으로 부르다가 1989년 혁명 이후 이름을 의회 궁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대부분의 루마니아 인들은 인민궁전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처음 시작은 '인민을 위한 집'이란 명칭으로 시작했지만 차우세스크 부부와 공산당중앙위원회, 인민회의 사무실로 쓰려고 지은 건물이란다. 규모부터 먼저 말한다면, 26만5000 넓이의 부지에, 정면길이는 270m, 측면길이 240m, 높이 84m, 지상 11층, 지하 3층으로 지어진 건물로 단일 건물로는 미국의 펜타콘 다음으로 큰, 세계에서 두 번째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라 한다. 건물 내에 3100여 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고, 내부에는 각지에서 수집한 아름다운 대리석, 3500여 톤의 수정으로 480개의 화려한 샹들리에, 1409개의 천장용 전구와 거울들, 벽과 천장, 화장실 등을 금으로 치장하는 등 매우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은 거대 규모의 궁전을 건축할 발상을 차우세스크는 하였을까. 차우세스크는 김일성과 호형호제할 만큼 서로 친했다고 한다. 그는 평양을 방문할 때 김일성이 주장한 주체사상을 보고 루마니아어로 번역하여 그도 개인숭배를 강화해 나갔으며 반면에 김일성은 무려 세 번이나 루마니아를 방문할 만큼 친했다고 한다. 그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궁을 보고 부러워한 나머지 더 큰 궁전을 건설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7년 부카레스트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스피리 언덕지구는 큰 피해를 모면한 것을 보고 이곳에(현 위치) 건축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설계공모전에서 젊은 건축가인 안카 페트레스쿠(Anca Petrescu)가 뽑혀 그의 설계에 의해 198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5년간 노동자들을 3교대하면서 24시간 내내 공사를 했다고 한다. 건축현장에는 항상 400여명의 전문 인력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차우세스크는 이 궁전과 궁전 앞 4에 이르는 통일로 주변을 프랑스의 샹제리제 거리로 만들기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도시계획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카레스트의 역사적인 고색창연한 문화재 중심지역 20%가 파괴되었고, 1만여 세대의 보금자리를 대책 없이 철거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려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거기에다 궁핍한 국민의 혈세를 남용하여 궁전을 짓는 데 비용을 아낌없이 썼다. 1984년부터 1989년에 걸쳐 루마니아 국민총생산의 30%를 투입했다고 한다. 결국 경제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여 불만이 극에 달한 국민에 의해 1989년 12월 25일 아내 엘레나와 함께 총살형을 당했다. 이 궁전을 완공한 후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며 연설하고 싶어했던 염원도 물거품이 된 채 공산 독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곳에서 최초로 손을 흔들게 된 사람은 마이클 잭슨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이 말썽 많은 건물을 대체 어떻게 할까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궁전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은 냉혹했지만, 쓰라린 역사의 한 면을 기억하기 위한 건축물로 그 위풍당당한 모습 그대로 보존키로 했다고 한다.


지금은 국회의사당, 국회의원 사무실, 국제학회장 등 행사장으로 사용하고 있어 의회궁이라 하며 건물 일부를 일반인들에게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졌다는 내부 구경은 시간이 없어 못하고, 통일광장까지 4에 걸친 통일로 거리를 관광할 수밖에 없었다. 이 통일로는 프랑스 숭배자인 차우세스크가 프랑스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를 보고 그대로 만들라고 지시하여 만들었다는데 길이는 샹제리제보다 6 더 길게 만들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통일로 양편으로 늘어선 (샹제리제 거리를 모방하여 만든) 유럽풍 건축물들은 아래층은 상가, 위로는 아파트식의 주상복합상가형이었다. 상가들은 모두 고급 상가이고, 아파트는 과거 공산당 간부들이 거주한 호화로운 아파트들이었다. 거리 중앙에는 루마니아 41주를 상징한 41개의 분수를 만들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통일광장에 이르자 부카레스트 시가를 가로 질러 흘러간다는 딤보비차강이 푸르게 흐르고, 광장중앙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의 대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이 광장 주변에는 현대적인 건물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부카레스트 최고의 번화가이자 쇼핑가라고 한다. 그 주변에서 여러 백화점들을 볼 수 있었고, 이곳에는 루마니아 수공예품부터 세계 각국의 전자제품까지 다양한 상품들을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높은 건물 위쪽에 외국 광고판들이 즐비한데 우리나라 'SAMSUNG' 광고판도 눈에 띄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루마니아 정교회 총본산인 대주교교회가 지붕 위에 흰색 3개의 돔을 나란히 한 채 우뚝 서 있었다.

'동유럽의 파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 부카레스트, 루마니아의 정체성을 되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차우세스크. 그러나 내려놓을 줄 모르는 욕심이 그를 독재자로 만들었고, 끝내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의 순간을 치르면서 다시 태어난 부카레스트의 화려한 거리를 둘러보면서 우리는 무한한 감회에 잠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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