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마리 쥐
여섯 마리 쥐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06.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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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개미'의 작가 베르베르가 자신의 저서에 소개한 한 프랑스 학자의 실험기이다.

여섯 마리의 쥐를 3면이 밀폐된 공간에 가둬둔다. 개방된 한 면은 물이 찬 풀장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풀장 한가운데 먹이를 띄워 놓는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헤엄을 쳐 나가서 먹이를 가져와야 한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쥐들이 자신이 처한 난감한 상황을 파악하게 되면 이들 사이에 규칙적인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헤엄을 쳐 풀장으로 나가 먹이를 가져오는 쥐는 늘 정해진 두 마리다. 그러나 이 먹이는 우리에서 기다리던 나머지 쥐 중 두 마리에 의해 강탈당한다.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먹이를 헤엄을 치느라 고생한 쥐 두 마리가 나눠 먹는다.

또 다른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네 마리가 벌이는 먹이 싸움의 과정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며 가까스로 연명한다.

주목받는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다. 그는 배가 고플 때 스스로 헤엄을 쳐 나가 먹이를 가져온다. 누구도 그에게 간섭하지 않기에 먹이를 빼앗기지도 않지만, 동료들에게 나눠주지도 않는다. 여섯 마리 중 자유의지를 누리는 유일한 쥐다.

어떤 쥐라도 여섯 마리를 이 공간에 가둬 놓으면 예외없이 2대 2대 1대 1의 계급 공식이 성립된다고 한다. 여섯 마리로 이뤄진 각 표본에서 약탈자들만 골라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더라도 헤엄치는 두 마리, 뺏어먹는 두 마리, 주워먹는 한 마리, 독불장군 한 마리로 분류된다. 심지어는 가장 무능력한 주워먹는 쥐나 약탈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똑똑한 쥐로만 여섯 마리를 골라 그룹을 짓더라도 이 같은 공식에 따라 역할이 재편된다고 한다.

쥐들의 이런 관계 정립이 무언가 우리 인간 사회와도 닮아 있지 않은가. 헤엄치는 두 마리는 빵을 비롯해 각종 재화를 생산하며 사회와 동료들에게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에 비교할 수 있겠다. 빼앗은 먹이를 배가 터지게 먹고난 다음에야 먹이를 가져오느라 고생한 동료들에게 찌꺼기를 던져주는 다른 두 마리를 어떤 계층에 비교할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들은 "중요한 것은 먹이의 위치를 찾아내고 물갈퀴를 제공하는 것이지 헤엄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주워먹는 쥐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낙오자일 터이다. 어쩌면 생산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자들일 수도 있겠다. 주변이야 어찌됐든 유유히 '마이 웨이'를 걷는 나머지 쥐는 누구일까. 약탈자들이 그가 가져온 먹이에는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그가 약탈자 못지않은 힘과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의 부당한 질서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지만, 그 질서의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약탈자들과 상호 불간섭의 답합을 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우리의 약탈 행위를 못 본 척해 주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여하지 않겠다'는 거래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공동체 내의 그릇된 질서를 바로잡을 능력과 식견을 가진 유일한 엘리트라는 점에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세 마리의 약자를 계몽하고, 두 마리의 약탈자를 압박해서 부당한 관계를 개선시켜나갈 유일한 조정자이다. 그가 나서지 않는 한 여섯 마리 쥐들이 엮어내는 부당한 사회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나마 쥐들의 세상에서 다행인 것은 이들이 약탈자와 한통속이 돼 헤엄치는 쥐들을 착취하는 데 가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철저한 방관으로 일관하며 책임을 방기했지만,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는 지키는 모양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선 약탈자들과 결탁해 헤엄치는 쥐들을 착취하는 추악한 엘리트 쥐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약탈자의 탐욕을 공박하는 목소리가 그간 방관해 온 집단에서 적지않게 터져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결기까지 감지되니 자못 결과가 기대되기도 한다. 하긴 쥐들 세상만도 못한 세상이 돼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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