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골 성자
얼음골 성자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1.06.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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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예수는 공회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데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꾸짖어 "외식하는 자여 너희 속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며 허례허식과 겉치레에 굳어 버린 양심을 질타했다. 다중인격처럼 표리부동한 이 세태에 예수의 가르침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저절로 맑은 향기 뿜는 난초를 굳이 창문 가에 두는 현대인의 몰염치를 자주 경험한다. 손과 발을 숨기고 얼굴을 가려 선행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행실을 드러내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 영글지 못한 마음도 흔히 본다.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삼갈 줄 아는 이가 군자라는 성현의 가르침은 타인을 속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은 양심은 속일 수 없다는 뜻에서 범인(凡人)이 실천하기엔 쉽지 않은 경지다.

청주어린이회관 뒤로 나 있는 등산로는 평일에도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완만한 경사와 소나무 숲이 아름다워 청주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다. 3km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상당산성과 마주 선다. 청주시를 조망할 수 있고, 산성 내로 들어가면 음식점이 즐비하다.

이곳을 오르다 보면 산성 닿기 100여 미터 전에 '얼음골'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의자 몇 개와 직사각형 모양의 얼음이 항상 놓여 있어 자연스레 불리는 이름이다. 누군가가 일부러 만든 공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잠시 얼음에 손을 대고 시원함을 찾으라는 누군가의 배려가 여실히 드러난다. 산성 내에서 이곳에 얼음을 갖다 논다고 해도 웬만한 거리를 지게로 이용하지 않고는 쉽사리 옮겨 놓기가 쉽지 않다.

주변에 작은 글씨로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이름도 모르지만, 수고를 감내한 그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무게를 짐작하면 대략 10kg은 족히 넘을 것 같다. 타인에게 시원함을 주기 위해 땀을 흘리며 등에 지고 산길을 올랐을 그분의 노고에 이심전심으로 감사하는 맘이 이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사다.

주말을 맞아 아침 일찍 산에 오르니 어느덧 '얼음골'에 닿았다. 어제 갖다 놓은 얼음이 반쯤 녹아 있다. 그러다 지게를 짊어지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쳤다. 직감적으로 '아, 저분이 매일 이렇게 얼음을 갖다 놓는구나!' 하는 생각에 걸음을 멈춰 섰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계단을 내려와 지게를 내려놓고 있다. 지게 위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얼음이 실려 있고, 지게 목발을 내려놓고 돌리는 등엔 얼음이 녹아 흠뻑 젖어 있다. 맨몸으로도 숨이 찬 산길을 지게에 얼음을 지고 오르는 그분의 모습을 한참을 보다 말을 건넸다.

"아저씨가 매일 얼음을 이곳에 갖다 놓으세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지게를 다시 짊어지려는 발길을 늦추며 그렇다고 한다. 궁금함에 다가가 "이렇게 고생을 하며 얼음을 갖다 놓는 사연이 있으세요. 얼음을 이곳에 갖다 놓은 지는 얼마나 됐어요?" 쏟아지는 질문에 잠시 나를 보더니 "한 8년쯤 됐지요. 8년 전에 이곳에서 주말에 아이스크림을 팔았는데, 한 노인이 오셔서 10만 원을 주며 저 밑에다가 얼음을 놓아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기에 좋은 일 같아 10만 원을 도로 돌려주고 매일 그 자리에 얼음을 갖다놓게 되었다."라고 하시며 지게를 짊어진다. "그러면, 그 노인은 자주 오시나요?", "전엔 자주 오셨는데 이제 못 본 지 3년 됐어요. 나중에 누군가한테 들었는데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이 뚝뚝 흐르는 얼음을 지고 걸어 내려간다.

맑은 바람 불어 귀밑머리 날리고 얼음보다 시원한 청량감에 두 손 벌려 바람을 맞는다. 시야에서 사라진 '얼음골 성자'를 보며 가볍지 않은 화두 마음에 담고 오지만, 내닫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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