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의 역사도 돌아보길
굴욕의 역사도 돌아보길
  • 권혁두 국장<영동>
  • 승인 2011.06.0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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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영동>

25년 전 옛 충청일보 수습기자 때 겪은 일이다. 문선공들이 한 자씩 활자를 뽑아 조판하고, 납을 녹여 만든 활판을 윤전기로 돌려 신문을 인쇄하던 시절이었다. 교열부를 거친 최종 교정지를 들고 윤전실로 들어섰을 때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복 차림의 경찰 간부 5~6명이 윤전기를 가로막고 신문 제작을 저지하고 있었다. 어떤 간부는 아예 윤전기 위에 벌렁 드러누워 결사적으로 '업무를 방해'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서너 달밖에 안 된 데다 내근만 해 온 기자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이들은 충북경찰청(당시 충북도경찰국) 과장급 간부들이었다. 그날 충청일보 사회면 활판에는 일부 경찰관들이 강절도범들에게서 압수한 장물을 빼돌려 처분했다는 기사가 올려져 있었다. 경찰 간부들이 몰려와 편집인과 편집국장을 만나 기사를 빼달라고 호소하다 거절당하자 윤전실로 내려와 물리력까지 동원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갔다.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으니까.

당시 선배들에게 들은 뒷얘기는 이랬다. 이 기사는 검찰 쪽에서 넌지시 흘렸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가 있으니 취재해 보라는 식이었지만, 6하원칙에 맞아떨어지는 사실관계를 상세하게 알려줘 별도 취재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고 했다. 선배는 당시 경찰 일각에서 수사권 독립문제가 거론돼 검경 관계가 불편해진 점을 들며, 검찰이 내사를 마치고 경찰의 코를 꿰어오던 사건을 뒤늦게 언론에 흘려 '이런 경찰에 수사권을 맡길 수 있겠느냐'는 여론전을 펼쳤다고 분석했다. 까불면 다친다는, 경찰에 보내는 메시지도 담겨져 있다고 했다. 육탄으로 보도는 막았지만 경찰로서는 씻지 못할 치욕이었다.

검·경의 수사권 문제는 60여년 묵은 숙제이지만 아직도 접점을 찾지 못하는 난제 중의 난제다.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제196조)에 맞서 경찰이 독립수사권을 요구해 온 것이 해묵은 갈등의 골자다. 1955년 법무부가 경찰기구 독립을 담은 법안을 제출하며 시작된 후 간헐적으로 논란이 불거졌지만 번번히 경찰이 패퇴했다. 검찰이 제기한 자질론에서 늘 밀렸기 때문이다. 경찰로서는 억울한 대목이기도 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조직 규모가 13만으로 검찰의 십여 배에 달하는 경찰이 비리나 민원 발생에서 검찰과 평면 비교되는 부당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수사권 조정 문제가 다시 돌출되며 여론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며칠 전 이 문제를 다룬 한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문자투표를 한 결과 투표자 97%가 '경찰에 일부 독립수사권을 허용하자'는 데 찬성했다고 한다. 전국 경찰 가족들이 적극 참여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압도적 표차는 민심의 현주소를 알리고 있다. 국회 사법개혁특위도 검찰개혁 방안의 하나로 '검사 지휘' 없이도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에 착수할 수 있는 '수사개시권'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이런 기류를 경찰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최근만 보더라도 검찰에서 스폰서·그랜저 검사가 조직에 오점을 남겼지만, 경찰도 함바집 청장이 나옴으로써 망신을 당했다. 솔직히 국민 신뢰도로 보자면 두 기관 모두 아직도 갈 길이 먼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권 논란과 개혁입법 과정에서 경찰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은 수사권,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 등 사법권을 독점한 검찰의 무소불위를 경계하는 인식이 발화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 경찰청은 '경찰역사에서 교훈찾기' TF팀을 구성했다고 한다. 경찰의 역사를 돌아보고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찾아 내부망을 통해 알릴 예정이란다. TF팀은 신문사 윤전기에 누워 기사를 막았던 부끄러운 역사들까지 돌아보며 교훈을 찾아야 한다. 과연 경찰이 검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독자적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으로 성장했는지 자문하고 성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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