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의 흉물
도심 속의 흉물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1.05.1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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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한갓진 오후, 도심을 벗어나 청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우암산을 오르다 보면 몇 개의 무덤과 마주친다. 도래솔에 둘러싸인 무덤을 보면 앙증맞은 여인의 젖가슴이 떠오른다. 해를 넘기지 않은 봉긋한 무덤은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농익은 여인의 가슴이고, 오래 묵은 묘는 납작하게 주저앉아 빈 젖을 물리던 할머니의 젖가슴을 연상시킨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봉분이 산의 능선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을 보면 죽음도 자연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정방형으로 끝이 날카로운 서양의 무덤과 달리 둥근 모양의 우리 무덤은 산세와 어그러짐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 수풀에 덮이고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으로 세운 석물(石物)만이 흉물로 남을 뿐이다. 자연과 모나지 않는 성품은 뒷산의 산세를 닮은 한옥의 추녀 끝과 곡선으로 가볍게 떨어지는 한복의 가냘픈 어깨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가슴에 품고 자란 시간이 오래되면 품성조차 닮아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마을 어귀의 둥구나무와 앞산·뒷산으로 불리던 산들이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어머니의 품처럼 인식되는 것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마치 도시가 그곳의 특산물이나 지명으로 기억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산 하면 자갈치시장이 떠오르고, 광주는 무등산이, 목포는 유달산, 울릉도는 오징어가 떠오르듯이 이름만으로도 눈물짓게 하는 것은 긴 시간과 역사가 다져놓은 결과물이다.

타지 사람을 만나 청주에 산다 하면 늘 듣는 얘기가 "청주에 들어갈 때 길옆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와 그늘이 참 인상적이었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도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암산 얘기를 빠트리지 않는다. 청주를 칭하는 여러 말 중의 하나가 '교육의 도시'와 '청풍명월', '양반의 도시'라는 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썩 괜찮은 말이다. 음전한 성품과 높은 학구열, 그리고 자연 친화적인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시내를 가다 보면 주변의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되똑하니 서 있는 초고층아파트를 보게 된다. 주위 사람에게 물어봐도 하나같이 도심의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볼 때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법적 하자가 없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지은 건물이라고 하지만 받는 느낌은 웅장함이 아니라 오만함에 가깝다.

동·서로 바라보는 우암산과 부모산, 그리고 야트막한 구릉에 집들이 모여 있고, 아파트 밀집지역은 도심의 외곽에 위치해 그런 대로의 모습을 갖춘 청주시 모습이 불균형이 돼 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청주시에 또 하나의 흉물이 들어선다. 청주시 사직4구역 도시환경정비구역 지정 및 정비계획안이 조건부 의결됐다. 무심천을 바라보고 지상 59층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도시환경정비 사업에 시민이 공감하지 못하고 단지 개발주의자들의 이해만 부각된 도시환경정비 사업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

한 도시의 랜드마크(landmark)가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이 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건축물은 한번 지으면 수십 년 동안 손을 댈 수 없다.

그래서 도시를 이루는 건물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맞아야 하며 도시 전체의 균형과 미적인 부분도 맞아야 한다. 높고 우람하다고 도심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한 줌의 바람도 허허롭게 지나고 그 밑을 흐르는 무심천의 물길과도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하는 관점이 아니라 밑에서 위를 보는 사람의 관점을 지향해야 한다.

모든 개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청주라는 지형에 녹아들고 시민의 가슴에 녹아드는 건물이 되어야 한다.

훗날 흉물이라는 소리를 또 듣는다면 그땐 후회해도 소용없기에 계획단계부터 시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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