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5.31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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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나누기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급작스런 어머니의 귀천이 육남매에겐 청천벽력이었다.

평생을 같은 걸음으로 결코 서두름 없는 품성을 지닌 분께서 저승 문을 여실 땐 왜 그리도 서두르셨는지. 준비 없는 실천을 용납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사흘 밤, 낮 동안 이승의 인연들과 마지막 작별의식을 치른 후 양지바른 팔봉산 자락에 유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안방에 육남매는 퉁퉁 부은 가슴을 부여안은 채 모였지만, 갓 깨어난 햇병아리들처럼 어미 품을 잃은 자식들은 말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팔순의 고개를 목전에 두고 생을 마치시며 육십여 년간 토닥이던 둥지에는 세월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은 허접한 세간들이 가신분의 빈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도, 아픔도 흐르는 시간이 약이 될 때가 있는가보다.

얼마 후 육남매는 물먹은 솜 자루 같던 심신들을 추스르며 남기고간 유산을 나누었다.

더도 덜도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받았던 생전의 모정으로 결속된 남매간 우애에 조금의 허물도 가지 않게 하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떨어지자마자 슬픔에 잠겨 침묵하던 모두의 눈에는 순간 새로운 힘이 번뜩였다.

맨 먼저 맏딸이 엄마의 손자국으로 얼룩진 작은 경대를 집어 품에 싸안았다.

그리고 둘째는 서랍 속에서 누렇게 퇴색된 낡은 가계부를 겸한 일기장, 셋째는 앙상하게 마른 목덜미를 감싸주던 털목도리, 그리고 막내딸은 이불장에서 핑크빛 이불 한 채를 꺼내 얼굴을 묻었고, 막내아들은 어머님의 손때로 절어버린 작은 손지갑을 집어들었다.

서로 낚아 채듯 한 가지씩 움켜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남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물었다.

깊은 한숨처럼 토해내는 담배연기가 바람을 타고 거실 안으로 들어와 무거운 침묵의 무게를 더 하게 했다.

이렇게 친정집은 어머니의 부재로 해체되고 손때 묻은 세간들은 유산으로 골고루 나뉘어 자식들의 둥지로 옮겨와 4년이 흘렀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허무가 찾아 올 때나 삶의 무게에 고달파지면 자식들은 어머니의 유품을 꺼내 보며 위로를 받고 마음을 추스른다.

부모님이 걸어오신 세월의 뒤안길을 낡은 일기장에서 만나고 부질없는 욕심으로 허덕이는 헝클어진 자화상을 작은 경대에 비춰본다.

이웃과 정을 나눌 줄 모르는 야박한 인생살이에서 삶이 허허로워지고 가슴이 시려 올 때면 어머니의 손길 같은 따스한 목도리를 목에 두른다.

멈출 줄 모르고 돌진하는 경쟁 사회속의 일원으로 뒤처지지 않으려 숨돌릴 틈 없이 뛰고 헐떡이다 지친 날이면 어머니의 품속에서 나던 달근한 젖내가 아직 남아있는 이불속으로 지친 몸을 뉘인다.

물질의 양으로 평가되는 각박한 인간관계가 더 인정받고 정으로 맺어진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들이 무력해지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지갑에 동전 몇 푼을 넣고도 마냥 행복해하던 어머니의 가난한 삶을 기억해 낸다.

어느덧 허접스럽게 보이던 어머니의 유품은 자식 육남매에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커다란 유산이 되어 부족하던 삶의 한부분을 채워가고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끊임없던 희생으로 일관한 부모님의 삶은 이제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었고, 고된 세상살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의 지향이 되고 지표가 되었다.

어머니가 주신 진실한 삶의 그림자들이 인생의 자양분이 된 우애 좋은 육남매들은 다음 세대에게 더 귀한 유산을 나눠주리라./수필가 정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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