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노란색이다
5월은 노란색이다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1.05.0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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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왜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는 거야?" 뜬금없는 아내의 질문에 마땅한 답이 생각나질 않는다.

4월을 흔히 '잔인한 계절'이라 부르고,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관용어처럼 사용하지만, 정작 그 의미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에서 전후(戰後) 서구사회의 삭막함을 '잔인한 계절'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오월이 여왕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잘 모른다.

'만물이 생육하기 좋은 계절이라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애매한 답을 하고 말았다.

오월이 갖는 상징성의 무게는 여왕이라는 호칭과는 무관하다. 5.18 민주화운동을 강제 진압해 금남로를 피로 물들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회귀시킨 아픈 상처의 계절이다. 시민이 군사독재와 맞서 총을 잡고 숭고한 민주주의 가치를 지켰던 그날도 햇살 좋은 오월이었다.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져 시민의 가치를 국민이 가슴에 심던 그날도 봄비 촉촉이 적시던 오월이었다.

오월은 노란색이다. 노란 티셔츠와 풍선이 하늘을 가리는 오월은 분명 노란색이다. 권위주의에 길든 우리에게 그의 대화는 낯설었다. 정치와 권력은 국민이 주었지만, 그것을 받아 쥔 그들은 항상 오만했다. 그들의 대화는 근엄했고 국민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순순히 그들이 만든 정책을 실행하기만을 원했다.

그래서 소탈하고 서민적인 그는, 입이 가볍다는 여론의 질타와 조롱을 당해야만 했다. 임기 내내 보수 신문은 그를 헐뜯고 비방하기에 열중했다. 희망돼지를 모아 선거 자금을 모았던 시민도 하나 둘 등을 돌리고 처참하게 난도질당하는 그를 보며 어서 그의 임기만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켜주지 못하고 논쟁거리만 생산하는 그를 보면서 서서히 지쳐갔다. 그가 당하는 고통이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 같아 차마 보는 것조차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방관자였다. 애당초 그를 대통령을 인정치 않았던 기성정치인들과 보수언론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너도나도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누렸지만, 그것이 정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린 또 다른 비판자였는지도 모른다.

참 바보 노무현이다. 국세청, 검찰청만 손에 쥐고 있어도 그렇게 쉽사리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알면서도 모든 권력을 놓았다. 소신과 원칙만 가지고 소통하기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짧고, 깊이는 얕았다.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야당의 모습이 우리 민주주의의 한계였음을 고백한다. 그땐 우린 몰랐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리며 봉화마을에 낙향해서 오리농법으로 농사짓고 생태환경 보전에 힘쓰던 그를 집 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조롱하듯 잃어버린 십 년을 외치는 보수집단의 날카롭게 선 이빨 안에 그를 몰아넣었다. 검찰조사를 받고 새벽에 봉화마을에 멈춰선 버스에서 내려 국민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던 애처로운 모습이 우리가 본 마지막 그의 모습이었다.

공정사회를 외치는 지금, 부도 직전의 은행은 우수 고객의 돈부터 불법적으로 돌려주고, 명문대 교수는 연구비를 횡령하고 수백 조의 돈을 처리하는 농협의 전산망 마비는 북한의 소행이라는 말 한마디에 면죄부를 얻은 듯한 모습이다. 이곳에 서민의 배려는 없다.

오월은 혁명의 달이다. 선홍빛 핏물로 이룩한 민주주의와 노란색 풍선이 하늘을 덮던 슬픔의 달이다. 광장을 막고 슬픔과 오열을 누른 서울의 오월은 민주주의 퇴보의 날이며, 추모비 하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청주의 오월은 눈물의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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