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등 벌금제 도입
차등 벌금제 도입
  • 안병권 기자
  • 승인 2011.02.21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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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안병권 부국장(당진)

지난 1988년 10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이던 미결수 12명이 호송 도중 집단 탈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7명은 검거되었으나 지강헌을 비롯한 4명은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씨 집에 잠입해 고씨 가족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이 사건을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던 것은 인질극을 벌인 지강헌이 방송카메라를 향해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나라 법이 이렇다." 비록 흉악한 범죄자의 말이었지만 이 말은 당시 한국 사회의 세태를 꼬집어 대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어 널리 유행했다.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그 효력을 상실했는지 곱씹어 보면 아직도 그의 말을 공감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지난해 제헌절을 맞아 중·고생 1762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법이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유리하게 적용되는가'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4.7%가 '그렇다'고 답했고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15.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개인 소득과 재산에 따라 벌금 액수를 다르게 매기는 '일수(日數) 벌금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일수 벌금제는 벌금을 일수로 정하고 1일 벌금액수를 행위자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정하는 제도다. 현행 한국의 벌금제는 빈부격차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한 범죄에 동일한 벌금을 매긴다. 재산 정도에 따라 동일한 벌금형이라도 개인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다를 수 있어 동일한 범죄에 대해 동일한 처벌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부유층엔 형벌의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반면, 벌금을 내기 힘든 빈곤층은 노역장에 유치돼 과잉 처벌받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재벌비리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타파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도 엿보인다. 20세기 중반부터 일수 벌금제를 도입해 운용중인 유럽에서는 핀란드 최대 기업 노키아의 부사장이 오토바이를 과속으로 운전하다 단속에 걸려 1억원의 벌금을 낸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정도의 벌금이라면 다시 과속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선진국이라 자신하는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한 사회는 이른바 '부의 공정한 분배'와 사회적 책임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에게 매질을 하고 그 대가로 가액을 매겨 소위 '맷값'을 치르는 재벌 2세가 존재하는 한 벌금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실례로 10만원의 벌금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금액인 반면 부유한 사람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다. 따라서 동일한 벌금 효과를 위해서는 소득의 몇% 등의 벌금을 부과해야 동일한 부담과 효과가 나타난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벌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수 벌금제 도입은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주는 효과가 있다. 이 제도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시행되어야 하며, 이제는 국민에게 사자성어로 각인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사라져야 한다.

일각에서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벌금의 차등 판결은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판결은 동일하되 사회적 지위, 재산, 수입에 따라 벌금을 경감해 주는 방법도 그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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