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을 추억함
정월 대보름을 추억함
  •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 승인 2011.02.17 2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나는 충청타임즈와 매주 금요일 글을 게재하기로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매주 목요일 원고를 신문사에 송고해야 된다.

이러한 약속은 목요일의 내 일상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글을 독자들이 읽게 되는 금요일 사이에 하루라는 시간적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나는 오늘 아침에 눈뜨기 무섭게 부럼을 깨물었다'는 문장을 구성할 경우 이 글을 읽게 되는 독자제현은 그 행위를 이미 어제의 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글 쓰는 나와 독자제현에게 벌어지는 시간과 인식의 차이는 분명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역사의 일종이다.

이른 아침 부럼을 깨물고 더위를 파는 정월 대보름의 풍속을 아이들에게 설명하며 이런 전통의 계승이 덧없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이러한 무상함은 내가 글을 쓰는 행위를 하는 당일과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생경함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이것 역시 단 하루 사이에 벌어지는 역사의 간극인 셈인데, 민족 최대 명절의 하나였던 정월대보름을 대하는 세태의 변화는 이런 차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월 대보름은 상원(上元)이라고도 하는데, 전래의 세시풍속에서는 설날만큼 중요한 날로 여겨왔다.

우리 세시풍속에는 이날 쌀과 보리, 콩, 팥, 조 등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오곡밥을 짓고 복쌈과 귀밝이술을 먹고 부럼 깨물기도 했다.

이날은 또 볏가릿대 세우기, 지신밟기, 다리밟기, 복토(福土) 훔치기,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더위팔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와 더불어 안택고사와 동제 등 제의를 행하기도 했다.

민속학자 임동권이 쓴 '한국세시풍속'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일 년 열두 달 동안 모두 192건의 세시행사가 있는데, 그중 정월 한 달에 전체의 절반이 넘는 102건이 있으며, 특히 음력 1월 14일과 15일에 해당되는 정월대보름 관련 항목 수가 55건으로 1년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정월대보름의 세시풍속은 농경사회라는 전통적 산업구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의 경건함을 바탕으로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을 맞아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정월대보름인 셈인데, 백가반(百家飯)이라는 이름으로 이 집 저 집의 오곡밥을 '조릿 밥'하는 풍속 역시 배불리 먹고 힘을 내서 농사에 전력하자는 격려의 뜻이 담겨 있다.

세상은 하 바뀌어 우리나라도 이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추억의 구호가 되어 버렸다.

농업은 산업혁명 이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근간의 지위를 잃었고, 지금은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중심이동을 거쳐 지식정보와 문화, 감성이 핵심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량은 이미 무기화되고 있으며, 지금 지구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서 일반 물가도 오르는 현상. 글쓴이 주)에 대한 걱정에 휩쓸리고 있다.

게다가 지금 온 국민을 걱정하게 하는 구제역 재앙으로 인해 대부분의 정월대보름 행사가 취소되고 말았으니 대보름 둥근 달을 맞으며 한 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바람마저 무색해지고 있다.

나는 정월대보름을 추억하며 글을 쓰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목요일과 독자제현이 이 글을 읽는 금요일 단 하루 차이의 시간 흐름을 역사의 하나로 전제했다.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던 수많은 세시풍속 역시 오랜 세월 관습과 농업 중심의 먹고살기의 중요함이 강조되는 역사적 전통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금 그 풍성한 간절함과 경건함은 산업구조의 변화와 세태의 달라짐으로 인해 점점 잊히고 있다.

문화적 원형과 근본의 흔들림이 결국 인간에게, 동물에게도 씻을 수 없는 재앙의 원인이 된 건 아닌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