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15>
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15>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1.01.27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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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륜 (충주)
충북에 문학의 씨 뿌린 '남한강 시인'

31년 등단… 초기 현대 모더니즘 선봬
日 식민지 정책 반발… 18년간 공백기
고향서 전원시 전환… '내륙문학' 창립

그 옛적 고려와 조선조(朝鮮朝)
뱃길이 발달하였다는 이 물줄기에
오늘은 다만 글자와 화상(形╂) 뭉겨진
조상(彫像)만 남았고
곡식(穀食)과 소금이 오르내리던 장삿배의
그림자는 그쳤다.

지난 한때는 공산군과 대진(對陣)하여
총탄과 포화가 서로 맞서던 곳
예 있던 집 간 곳 없이
주추만 남은 빈자리에
지금은 무, 배추꽃이 한창이다.

원포(遠浦)에는 돌아오는
돛단배도 있었다면
평사(平沙)에는 기러기 짝지어
내려앉음도 있었으리

마음에 그려보는 부조(父祖)의 멋
내가 그 멋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듯
江물이 흐른다.

내가 오늘을 목메어하듯
흐르는 江물이 바위를 넘는다.

-시 '남한강'

역사문화의 고장 충주에는 남한강이 도심을 끼고 도도히 흐른다. 이 물줄기를 따라 사람들이 터를 잡으며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지고 진화했다. 이런 역사·문화적 요소들은 지역에 문인과 예술인들을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남한강 시인으로 불리는 박재륜 시인 역시 충주에서 태어났다. 가금면 가흥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총명했으며, 열살 때부터 시를 썼을 만큼 문학적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은 그는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며 문학에 발을 들여놓는다. 당시 괴테와 셀리, 보들레르에 심취해 있던 그는 학교 교지 편집에도 참여해 문학 생활에 젖어든다.

박 시인의 문학적 감성은 휘문고보 재학시절 개벽에서 발간하던 '학생' 릴레이 형식의 연작소설 모집에 당선되면서 이목을 끌었다. 이후 1930년 '조선지광'에 '풍경 점.점.점'을 발표하고, 1931년 '신여성', 'MISS. R호의 풍선구'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는 당시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던 김광균, 오장환, 장만영, 김기림, 이상, 정지용, 유치환, 이한직, 조경희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열정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는 1940년 '잠 오지 않는 밤의 노래' 등 5편의 시를 끝으로 절필을 한다.

활발하게 문단활동을 펼친 시인은 초기 작품에서 현대 모더니즘의 시를 선보인다. 언어와 자유, 감동과 직관을 날카롭게 결합시키며 시적 재질과 시적 안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가 한국 모더니즘 시의 대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다.

당시 김기림 문학평론가는 '1933년의 신단의 회고와 전망'에서 "박재륜의 시가 이미 매우 익숙한 시상에 도달하고 있다"고 호평할 만큼 내적 성숙의 궤적을 끊임없이 문학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시인의 문학적 열정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말 사용을 할 수 없게 되자 아예 절필로 시인의 삶을 중단한다. 이후 그의 문단의 공백기는 18년간 이어지다 1958년 문단에 복귀한다.

고향을 떠났던 시인은 6.25 피란 중 고향에 돌아와 1958년부터 교단에 선 후 '궤짝 속의 왕자', '메마른 언어' 등 다수의 시집을 펴냈다.

고향에 머물면서 그는 전원시로 전환한다. '메마른 언어', '전사통신',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 '흰 수염 갈대꽃'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한다. 고향에 대한 애정은 창작 생활과 더불어 '내륙문학'을 창립하는 등 불모지 충북에 문학의 씨를 뿌렸다. 지난 2001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시인은 신경림 시인과 함께 충주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 박재륜(1910~2001)은 누구

1910년 충북 충주시 가금면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조선지광'과 '신여성'으로 등단, 이후 고향에 머물면서 문학활동을 펼쳤다. 내륙문학회 회장과 제4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충주시지부장(1980~1982)을 역임했고,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과 한국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2001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시집으로 '궤짝 속의 왕자', '메마른 언어', '천상에 서서', '흰 수염 갈대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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